연암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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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석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0-06-01 08:11 조회3,491회 댓글0건본문
燕巖 朴趾源
燕巖 朴趾源(1737=英祖13-1805=純祖5년) 實學子 그 中에서도 北學派 중에서 最高峰을이룬 學者이며 小說家로서 .그는 名門 家族 出身이였으나 어려서 孤兒가 되어 祖父 朴弼均에 슬하에서 자라다가 14歲 때에 祖父마져 여의고 16歲 때에 장가를 들고妻叔人 李君文을 師事하여 비로소 學文에 길을 나가게되고 이로부터 發憤力學하여 3年 동안에 經學. 兵學 .農學. 國家財政學 等一切의 經世의 學文에 널리 通하게 되었던 것이다.
燕巖은 科擧보는 일을 등한시했다. 그는 술이 몹시취하면 혹은 當路의 貴人과 僞學 欺世하는 무리들을 비난 공격하기 일수였다. 따라서 그는 오랜 동안 불우하게 지내고있던중. 正祖初年에 洪國榮에게 僻派로 몰려 화網에 걸릴번 한일도 있었다. 正祖4年(1780)의그 三從兄 朴明源이 淸나라 高宗의 七旬壽慶에 대한 陳賀使로 떠날때에 燕巖은 그 隨員으로서 숙원이 였던 淸나라로 가게되였던 것이다.
그가 떠난 것은 그해 6월이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것은 그 해 연말이였다. 돌아와서 지은 책이 [熱河日記]로서 이것은 淸나라 治下의 北中國과 南滿洲 一帶를 旅行했을 때의 見聞과 그 에얽힌 隨想을 收錄한 것인 바 이 冊은 紀行文의 白眉일 뿐아니라 그의 經世思想을 集大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冊은 당시에 수많은 사람에게 영양을 주엇을 뿐만 아니라 멀리그 愛孫 인 瓛齋 朴珪壽를 통하여 甲申政變의 主動人物이 였던 金玉均 朴泳孝 등에게도 크나큰 영향을 미처든것이였다.
燕巖은 正祖10年 (1786) 50歲가되서야 비로서 從9品의 末職인 繕工監 監役이란 벼슬에 나아가게 되었고 55歲에 漢城府 判官 다시 安義縣監 또 승진되여 沔川郡守 襄陽郡守 등 그 후 3年이지나서 純祖5年(1805)에 69歲를 一期로 世上을 떠났다.
燕巖이 病이위독 했을 때 朴齊家가 問候하고 泫然히 눈물을 흘리며 .
[大夫님 어찌 小子를 버리고자 하십나이까?] 하니 그가 平日에 얼마나 依仰했는가를 알 수 있다. 燕巖은 不義에 타협할줄 모르는 사람이였다. 僞善과 僞學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였다. 平民的이고 平等主義를 信奉하는 사람이였다
洪吉周가 말한바와같이
[기운은 足히 六合을 가로지를 만 하고 재주는 千古를 凌駕할만하고 文章은 萬類를 顚倒할만 하다.] 칭찬할 만한 사람이였던 것이다.
燕巖은 周知하는 바와 같이 實學子로 그중에서도 北學派의 第一人者로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年下者나 下人이나 심지여 夷狄이라 할지라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워야한다.
하여 우리보다 나은 淸나라에서 배워야 한다고 했으며 耳口의學文은 學文이 아니라고 했고 學文은 어디까지나 實用的이어야 한다고 主張했던 것이다.
燕巖의 思想은 固陋한 華夷的 名分論자들과 같이 事大主義에서가아니라 어디까지 主體意識에 立脚하여 우리 自體의 富國强兵에 그 主眼點을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말로 고처 말한다면 北學은 결국 利用 厚生 正德을 最高의 目標로 하였던 것이다.
끝으로 梁柱東 博士의 말을 빌어 이글을 마무리하려한다.
韓國 漢文學의 代表로 羅代에 崔致遠 麗代에 李奎報 鮮代에 朴趾源 (1737-1805)을 치지않을 수 없다. 그러나 孤雲은 다만 그 화려한 렬體로 白雲居士는 그 瞻富한 筆意와 汪洋한 文材로 모두<글>로만 드날려렸을뿐.정작 사상과 <實學>을 그 글에 담아 <文>과<質>이 아울려 빛난 수많은 걸작을 남긴 이는 실로 燕巖---이런 의미에서 그는과연 歷代 最高의 名家라 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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