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공의 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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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춘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0-05-31 11:26 조회3,908회 댓글0건본문
열여섯 살에 관례를 올리고 처사인 유안재 이공(이보천)의 집안에 장가드셨다. 처사는 근
엄하고 청렴고결하여 예법으로써 자신을 단속하였다. 그 아우 학사공 양천은 경서와 사서
를 아주 좋아했으며 문장에 뛰어났다. 아버지는 처사에게서 孟子를 배우고 학사에게서 사
마천의 글을 배워 문장 짓는 법을 대강 터득하셨다.
하루는 『항우본기』를 모방하여 『이충무공전』을 지었는데 학사공이 크게 칭찬하시며
반고와 사마천과 같은 글솜씨가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약관 때부터 지기가 높고 매서웠으며 자잘한 예법에 구애되지 않이하여 가끔씩
유회를 하곤 하셨는데, 처사는 특별히 아버지를 애지중지하여 가르치고 꾸짖었으며 절실
한 말로 바로잡아 옛사람이 이룬 바와 같은 성취를 기대하셨다. 처사는 언제가 학사공에
게 이렇게 마씀하셨다고 한다.
“지원이는 그 재기를 보니 범상한 아이와 크게 다르더라. 훗날 반드시 큰사람이 될 게다.
다만 악을 지나치게 미워하고 뛰어난 기상이 너무 드러나 그게 걱정이다.”
아버지는 처사를 마음속 깊이 존경 하셨다.
산 속의 절이나 강가의 외딴집에서 독서하셨는데 아버지 따라 함께 공부한 분이 10여명이
있었다. 동년배중 훗날 정승이 된 김이소(金履素 1735~1798)나 판서가 된 황승원(黃昇源)
은 모두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지만 의문나는게 있으면 아버지께 묻곤 하였다.
아버지께서 스므 살 때 일이다. 지으신 글을 강한(江漢) 황경원(黃景源)에게 갖고 가 질정
을 구하였다. 황공은 당시 문형(文衡 대재학의 별칭) 이었는데 크게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
다.
“훗날 이 자리에 앉을 사람은 틀림없이 자넬 걸세!”
아버지는 경인년(1770년) 감시에 응시하여 초종장(初終場)에 모두 장원을 하셨다.. 방이
붙던 날 저녁 임금님께서는 아버지에게 침전으로 입시 하라는 특명을 내리시고, 지신사
(知申事)로 하여금 시험 답안지를 읽게 하셨다. 임금님께서는 손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장
단을 맞추어가며 들으셨다. 그리고 나서 크게 격려하는 말씀을 해주셨다.
아버지는 회시에 응시하지 않으려 하셨는데 꼭 응시해야 한다고 권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래서 억지로 시험장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답안지를 내지 않고 나오셨다. 식견 있는 사
람들은 이 사실을 전해듣고는 모두 말하기를
“구차하게 벼슬하려 하지 않으니 옛날 사람의 풍모가 있다”
고 하였다. 유안옹(遺安翁): 이보천)은 이 때 시골집에 머물러 계셨는데 그 아들에게 말하
기를
“지원(趾源)이 회시를 보았다고 하여 나는 그다지 기쁘지 않았는데. 시험지를 내지 않았다
는 애기를 들으니 몹시 기쁘구나” 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초시의 초종 양장에서 장원을 하신 것은 모두 우연이었으니 임금님의 극진한 은
혜를 입게 됨애 그 명성이 더욱 높아 졌다. 그래서 당시 시험을 주관하는 자들은 아버지를
반드시 회시 합격 시켜 자신의 공으로 삼으려 하였다, 아버지는 이런 분위기에 영합하여
이익을 구하는 것을 경계하여 용감하게 이같은 결단을 내리신 것이다.
박종채 지음 박희병 서울대교수 번역 과정록(過庭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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