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공 선친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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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암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0-05-29 03:54 조회4,404회 댓글0건본문
친애하는 종원 여러분 !
영국을 대표하는 문장가는 세익스피어이며,독일을 대표하는
문장가는 괴테라고 할 수 있으며,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장가
는 연암공(휘 지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한마디로 연암공은 우리문중의 자랑스런 선조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문장가라는 자부심을 모
든 종원들께서 가지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점에서 생각할 점이 있으니,그러한 연암공의
선친에 대한 부분이 그동안 잘못 소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
한 대문호의 선친이라고 하기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록이 거
의 없다는 점입니다.
지난 15일에 " 연암선생을 바라보는 눈 " 을 올린 것을 계기로
그동안 여러편의 글을 올린 바 있는데,많은 종원님들께서 깊
은 관심을 보여 주신 점에 대하여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마
음을 전합니다.
이제 연암공의 선친에 대한 저의 견해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
겠습니다.
연암공 선친 박사유 공은 1703년 장간공의 장남으로 출생을
하여 1767년 향년 65세로 서거하시는데,놀랍게도 이러한 실제
적인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연암공과 관련된 많은
자료에서 선친이 연암공이 어린 시절에 돌아가신 것으로 묘사
를 하여 결과적으로 연암공의 어린 시절은 선친의 보살핌을 받
지 못하고 주로 조부이신 장간공이 양육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
니다.
심지어 어떤 자료에는 구체적으로 연암공이 두살때 선친이 돌
아가신 것으로 되어 있으니,제가 이미 밝힌바와 같이 이러한
오류가 거슬러 올라가서 1900년 연암집이 최초로 간행될 당시
에 서술된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으나,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완전히 오류가 시정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히 생각할 점이 있다고 사료됩니다.
이와 더불어 선친에 대하여는 근본적으로 관련 기록이 발견이
안되고 있다는 점인데,예를 들어서 한 인물의 생애를 다루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기록인 행장,묘갈문이 발견이 안되고 있는데,
여기서 한가지 궁금한 점이 이러한 기록이 원래부터 없었던 것
인지,아니면 원래는 있었는데,그 이후에 없어진 것인지 명확히
알 수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나마 한가지 고무적인 소식은 연암공의 손
자인 환재공(휘 규수)의 행장에서 연암공의 선친이 이조판서
의 증직을 받으셨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는데,사실상 이러한 기
록이 선친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이라 할 수 있기는
하나,엄밀히 말하여 증직이란 돌아가신 이후에 내리는 것이시
기에 선친의 생전의 삶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할 수 있습
니다.
저로서는 무려 65세까지 수를 누리셨던 연암공의 선친이 과연
어떤 선조이시길래,이리도 관련 기록이 없는 것인지 매우 궁금
합니다.
제가 이러한 선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은 원
래 역사적으로 잊혀진 인물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이 있는 성향
을 가진데다가,다른 분도 아닌 대문호이신 연암공의 선친이라
는 특수성도 있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번 기회에 연암공의 소종중에서 선친과 연관되
어 잘못 알려진 기록의 시정을 비롯하여 더 나아가서 전반적인
자료수집를 하여 주셨으면 하는데,여기에 대한 소종중의 입장
은 어떠하신지 답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0년 5월 29일(토) 시사칼럼니스트 문 암 올 림.
영국을 대표하는 문장가는 세익스피어이며,독일을 대표하는
문장가는 괴테라고 할 수 있으며,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장가
는 연암공(휘 지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한마디로 연암공은 우리문중의 자랑스런 선조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문장가라는 자부심을 모
든 종원들께서 가지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점에서 생각할 점이 있으니,그러한 연암공의
선친에 대한 부분이 그동안 잘못 소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
한 대문호의 선친이라고 하기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록이 거
의 없다는 점입니다.
지난 15일에 " 연암선생을 바라보는 눈 " 을 올린 것을 계기로
그동안 여러편의 글을 올린 바 있는데,많은 종원님들께서 깊
은 관심을 보여 주신 점에 대하여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마
음을 전합니다.
이제 연암공의 선친에 대한 저의 견해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
겠습니다.
연암공 선친 박사유 공은 1703년 장간공의 장남으로 출생을
하여 1767년 향년 65세로 서거하시는데,놀랍게도 이러한 실제
적인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연암공과 관련된 많은
자료에서 선친이 연암공이 어린 시절에 돌아가신 것으로 묘사
를 하여 결과적으로 연암공의 어린 시절은 선친의 보살핌을 받
지 못하고 주로 조부이신 장간공이 양육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
니다.
심지어 어떤 자료에는 구체적으로 연암공이 두살때 선친이 돌
아가신 것으로 되어 있으니,제가 이미 밝힌바와 같이 이러한
오류가 거슬러 올라가서 1900년 연암집이 최초로 간행될 당시
에 서술된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으나,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완전히 오류가 시정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히 생각할 점이 있다고 사료됩니다.
이와 더불어 선친에 대하여는 근본적으로 관련 기록이 발견이
안되고 있다는 점인데,예를 들어서 한 인물의 생애를 다루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기록인 행장,묘갈문이 발견이 안되고 있는데,
여기서 한가지 궁금한 점이 이러한 기록이 원래부터 없었던 것
인지,아니면 원래는 있었는데,그 이후에 없어진 것인지 명확히
알 수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나마 한가지 고무적인 소식은 연암공의 손
자인 환재공(휘 규수)의 행장에서 연암공의 선친이 이조판서
의 증직을 받으셨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는데,사실상 이러한 기
록이 선친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이라 할 수 있기는
하나,엄밀히 말하여 증직이란 돌아가신 이후에 내리는 것이시
기에 선친의 생전의 삶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할 수 있습
니다.
저로서는 무려 65세까지 수를 누리셨던 연암공의 선친이 과연
어떤 선조이시길래,이리도 관련 기록이 없는 것인지 매우 궁금
합니다.
제가 이러한 선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은 원
래 역사적으로 잊혀진 인물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이 있는 성향
을 가진데다가,다른 분도 아닌 대문호이신 연암공의 선친이라
는 특수성도 있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번 기회에 연암공의 소종중에서 선친과 연관되
어 잘못 알려진 기록의 시정을 비롯하여 더 나아가서 전반적인
자료수집를 하여 주셨으면 하는데,여기에 대한 소종중의 입장
은 어떠하신지 답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0년 5월 29일(토) 시사칼럼니스트 문 암 올 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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