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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연암공의 조부 장간공 가장(家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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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암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0-05-27 07:52 조회4,2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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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 자헌대부(資憲大夫)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증시(贈諡) 장간공(章簡公) 부군(府君) 가장(家狀)

부군의 휘는 필균(弼均), 자는 정보(正甫)요, 초휘(初諱)는 필현(弼賢)이다. 우리 박씨는 계통이 신라에서 나왔으며, 나주(羅州)의 반남현(潘南縣)에서 성(姓)을 얻어 반남인이 되었다.

고려 공양왕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낸 휘 상충(尙衷)이 맨 먼저 상소를 올려 명(明) 나라를 받들 것을 청하였는데 그 사실이 《고려사》 본전(本傳)에 실려 있으며, 우리 왕조에서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추증하였다. 문정공의 아들 휘 은(訔)은 우리 태종대왕을 도와 좌의정에 올랐고 시호가 평도(平度)이다. 여러 대를 지나 휘 소(紹)는 사간(司諫)을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인데, 세상 사람들이 야천선생(冶川先生)이라 불렀으며 부군에게는 6세조가 된다. 휘 응복(應福)을 낳았는데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고조(高祖)는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휘 동량(東亮)인데, 공훈을 세워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증조(曾祖)인 금양위(錦陽尉) 휘 미(瀰)는 선조(宣祖)의 제 5 녀 정안옹주(貞安翁主)에게 장가들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요, 조부는 첨정(僉正)을 지낸 휘 세교(世橋)인데 이조 판서 금흥군(錦興君)에 추증되었다. 고(考)의 휘는 태길(泰吉)인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종숙부 문순공(文純公) 세채(世采)에게 사사(師事)하였고 뛰어난 행실로 명성이 사우(士友)들 사이에 자자하였으나 일찍 졸(卒)하였다. 비(妣)는 칠원 윤씨(漆原尹氏) 진사 선적(宣績)의 따님으로서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다.

부군은 숙종 11년 을축년(1685) 정월 1일에 태어났다. 다섯 살에 부친을 여의고 중부(仲父)인 교리공(校理公) 태만(泰萬)도 곧이어 졸하였으므로 부군은 종형(從兄)인 금녕군(錦寧君) 필하(弼夏)에게 양육을 받았는데, 금녕군의 아들인 판서공(判書公) 사익(師益)과 참판공(參判公) 사정(師正)이 모두다 부군보다 나이가 많았다. 부군이 어려서 학문을 시작하여 약관에 이르러서는 경사(經史)를 널리 통하였는데, 이는 모두 그들을 따라 배운 덕분이었다.

금녕군이 오랫동안 담화병(痰火病)을 앓던 중에도 부군을 사랑한 것은 유독 지성(至性 극히 선량한 성품)에서 나온 것이었다. 병이 심하게 되자 발자국 소리와 문소리를 특히 싫어하였으나 부군의 발소리와 문 여닫는 소리만은 탓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군이 그 안색을 먼저 살핀 다음에 아들들을 데리고 와 뵙게 하였으며, 아들들이 매일 밤늦은 시각에 땔감을 가지고 아궁이 앞에 서 있다가 부군이 몰래 전하는 기침 신호를 받은 뒤에야 감히 불을 지피곤 하였다. 혹 그 틈을 얻지 못하면 날이 차고 눈이 얼어붙어도 문 안팎에서 함께 날을 새며 서로 가엾이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무릇 이와 같이 하기를 8, 9년이 되도록 하루같이 하였다. 그래서 판서공 형제는 부군의 은덕이 골육보다 낫다고 감격해하였으며, 부군이 비단 양육해 준 이에게 효도를 실천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효를 실천하도록 만들어 주기까지 한 것을 온 집안이 모두 칭송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대부들 사이에 언론이 서로 엇갈려 각각 자기가 어질게 여기는 이를 스승으로 삼아, 비록 한집안일지라도 지향하는 바가 동일하지 않으면 나가는 길이 서로 달라지곤 하였다. 부군의 사촌 형제 수십 명 중에 부군의 나이가 가장 적었지만 명론(名論 명분론)은 가장 고명하였다. 종형 여호선생(黎湖先生) 필주(弼周)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는, 장차 한강 밖으로 은둔할 계획으로 부군의 어린 아들을 데려다 양자를 삼고 가사(家事)를 모두 부군에게 맡기면서 출처(出處 벼슬길에 나서는 문제)로써 부군을 권면하여 말하기를,

“나는 죄를 짊어지고 태어난 몸이라 - 선생이 태어나자마자 모부인(母夫人)이 첫 국밥도 들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 세상에 나갈 뜻을 끊고 지냈는데 지금 허명(虛名)으로 자신을 그르치게 되었으니, 부득불 한강을 경계로 삼아 그 너머에서 몸을 마치려 하네. 우리 아우는 재주나 학식이 모두 넉넉한데도 평생토록 과거를 보지 않고 있으니 장차 어떻게 몸과 집안을 일으킬 작정인가?”

하니, 부군은 썩 즐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천하의 의리가 무궁하다지만 끝내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것은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조야(朝野)에서 이익을 농단(壟斷)하려는 사람이 많지만 만약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을 잘못 끌어들여 이익을 독점하려고 한다면 우리 집안의 의론(議論)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우리 집안의 양대(兩代) 비갈(碑碣)은 대로(大老 송시열(宋時烈))께서 지은 것이요, 우리 중부(仲父 박태만(朴泰萬))께서 청한 것입니다. 우리 중부께서 불행히 세상을 일찍 떠나셨으나, 예전부터 팔학사(八學士)의 칭호를 받았는데 세상에서 국시(國是)를 어기는 자들이 멀리서 받들어 존중하였으니, 이를 어찌 변론하여 밝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남구만(南九萬)과 유상운(柳尙運)이 각자 제 몸을 위하는 꾀를 내어 사론(邪論)을 주창했으니 이는 진실로 해독을 백세에 끼칠 것입니다. 그런데 유상운은 우리 집안의 외손이므로 그에 연루되어 점차 물들고 있으니,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을 끊지 않는다면 이 어찌 우리 집안의 큰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한 집안의 명론(名論)이 진실로 바르게 된다면, 내가 과거 보는 것이 아무리 늦더라도 다시 무엇을 한스럽게 여기겠습니까.”

하였다. 급기야 경종(景宗) 초년에 남구만과 유상운의 무리가 크게 무옥(誣獄)을 일으켜 건저(建儲)한 여러 대신을 죽이고 사류(士類)들을 마구 없애자 부군은 통진(通津)의 묘소 아래 은거하였다.

영종(英宗) 원년 을사년(1725)에 비로소 정시(庭試)에 응시하여 병과(丙科)에 들었으니, 이때 나이 벌써 41세였다. 대개 한 번의 응시로 급제하는 경우는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이해에 왕세자를 책봉하고 시강원(侍講院)의 요속(僚屬)들을 엄선하였는데, 참하관(參下官 7품 이하 관원)은 청망(淸望)으로서 겸함(兼銜)을 더욱 중히 여겼다. 이때 부군은 아직 분관(分館)이 되지 못하였는데도 상례(常例)를 뛰어넘어 특별히 겸설서(兼說書)에 제수되었고, 얼마 후 한림(翰林 예문관)에 천거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가 대교(待敎)에 올랐다.

병오년(1726)에 모친 윤부인(尹夫人)의 상을 당하여 삼년복을 마치고, 도로 한림에 들어와 봉교(奉敎)로 올랐다. 무신년(1728) 이전에 제수받은 것은 다 구명(舊名 필현(弼賢))으로 받은 것이고 봉교 이하의 관직부터는 지금 이름으로 받은 것이다.

기유년(1729)에 《경종실록(景宗實錄)》이 완성되자 4월에 적상산 사고(赤裳山史庫)에 수장하고 이어 선조(先朝 경종(景宗))의 사첩(史牒)을 고출(考出)하였다. 임금이 한림을 새로 추천할 것을 재촉하여, 부군이 추천을 맡는 것을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혹자가 김약로(金若魯)를 넣어 달라고 부탁하자 부군이 말하기를,

“내가 예전에 김사직(金士直 김약로의 아버지 김유(金楺))을 조상(弔喪)하였는데 여러 아들 가운데 눈이 붉은 자가 있더니 이자가 바로 그자인가?”

하였다. 분향고사(焚香故事)에 추천을 맡은 자는 추천장을 소매에 넣고 한림의 선배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는데, 예문관에 소속된 하인이 먼저 문으로 들어가 소리 높여 손님을 물리치라고 하면, 아무리 대관(大官)이라도 전에 검열을 지낸 사람이 아니면 으레 다 자리를 피해야 한다. 그리하여 찾아온 사람과 주인이 처음부터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채 새 추천장을 꺼내 보여 털끝만큼의 하자도 지적되지 않은 다음에야 비로소 완천(完薦 추천 완료)이 되었으니, 그 엄격함이 이와 같았다. 이것은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중히 여긴 까닭이다.

이때에 문벌(門閥)과 재학(才學)이 막상막하인 자가 오륙 명이었는데 급기야 신만(申晩)과 윤급(尹汲)을 한원(翰苑 예문관)에 추천해 들이자, 온 세상이 떠들썩하여 모두 부군을 허물하며 ‘오로지 외모만 취하였다.’ 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관옥(冠玉)같이 아름다운 자라고 해서 반드시 내실을 갖춘 것은 아니다.’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어찌 그리 기탄이 없는 것이 그렇게도 제 외숙을 닮았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부군을 위하여 걱정하며 ‘눈이 붉은 자가 두렵다.’ 하더니, 마침내 이것이 구실이 되어 원망하는 뭇사람 중에 김약로가 특히 심하였다. 얼마 안 가서 마침내 대간(臺諫)의 진언(進言)으로 추천이 폐기되었고 부군은 이로 인하여 삭직되었다가, 곧 서용(敍用 복직)되어 6품에 올랐다. 경술년에 비로소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이전에 임금이 새로 즉위하자 제일 먼저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 등 여러 역적을 베고 네 충신을 위하여 사당을 세웠는데 두어 해가 못 가서 저쪽 사람들이 다시 국권을 잡게 되어 네 충신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였으니, 이를 정미진퇴(丁未進退 정미환국)라 한다. 무신역변(戊申逆變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있은 이후로 구신(舊臣)들을 거두어 서용하여 차츰차츰 조정에 다시 서게 하였지만, 이로부터 충역(忠逆)이 뒤섞이게 되고 시비(是非)가 똑같아지는 등 당파 간의 조정(調停)에만 힘을 쏟아 마침내 탕평책(蕩平策)이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충민공(忠愍公)과 충익공(忠翼公)의 관작만을 회복시키고 충헌공(忠獻公)과 충문공(忠文公)은 죄안(罪案) 속에 그대로 두었음에도 그 원통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없더니, 부군이 상소를 올려 극언하기를,

“두 신하가 신원(伸寃)되지 못하면 성상(聖上)에 대한 무고도 씻을 수 없고, 뭇 흉적(凶賊)을 그대로 키우면 임금의 원수 역시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한(漢) 나라와 역적은 양립하지 못한다는 것은 의리가 본시 두 가지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네 신하는 바로 한 몸인데, 반은 신원이 되고 반은 신원이 되지 않아 두 갈래로 나눠진다면, 이는 비유컨대 중풍을 앓는 사람이 몸의 반만 마비가 되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불인(不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나라를 다스리는 이들이 이를 남의 일 보듯이 하여 조금도 구제하려 하지 않으니 그 ‘불인’이 너무 심하다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하시고 싶은 일이 어찌 나라의 원칙을 세우는 정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시비(是非)를 전도시키고 억지로 호대(互對)를 찾고 있으니, 이는 이른바 ‘그 뿌리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그 끝만 맞추려는’ 것입니다. 나라의 원칙을 세우는 일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관직을 임명하고 토죄(討罪)를 명하는 것이 올바른 천리(天理)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마침내 사의(私意)를 면하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본원(本源)을 다지는 입장에서 만약 이 병폐를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아무리 잘 다스리고자 하여도 아마 그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런데 장령(掌令) 윤흥무(尹興茂)가 이를 두고 부군이 당을 비호한다고 질책하면서 삭직을 요청하는 계사(啓辭)를 올렸다. 신해년(1731)에 비로소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소명(召命)을 어겼다는 죄로 파직되었다가 7월에 다시 정언에 제수되자 상소를 올리기를,

“선왕(先王 경종(景宗))께서 병이 있으시고 후사마저 없으므로 당시 대신들이 선왕의 수필(手筆)을 받들고 자성(慈聖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언교(諺敎 언문 교서)를 받들어 종사(宗社)를 위하여 왕세제를 세웠으니 이는 대신으로서 해야 할 정상적인 직임인데, 불행히도 세도(世道)가 뒤바뀌어 새 죄안(罪案)을 억지로 첨가했으니, 어찌 거듭 원통할 일이 아니리까. 신이 지난번 상소에서 신원을 청한 것은 온 나라의 공통된 정론(正論)인데, 윤흥무가 갑작스레 ‘당을 비호한다’ 일렀으니, 그가 비록 감히 그 일을 바로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행동과 언사에서 그 정상이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특명으로 상소를 돌려주고, 소명을 어긴 죄로 파직시켰다.

임자년(1732)에 용인 현령(龍仁縣令)으로 나갔으며, 계축년(1733)에 홍문관 부수찬으로 선발되었다가 교리로 승진하였고, 또 옮겨서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가 도로 수찬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다 취임하지 않았다. 시강원(侍講院)의 사서(司書), 겸사서(兼司書), 문학(文學), 보덕(輔德)을 지내고, 그 사이에 학교수(學敎授 사학(四學)의 교수), 별겸춘추(別兼春秋), 훈국랑(訓局郞 훈련도감의 낭관(郎官)), 사복시 정(司僕寺正)을 맡았다.

경신년(1740)에 부응교(副應敎)에 제수되고 그해 6월에 효종(孝宗)의 휘호(徽號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할 때 대축(大祝 축관의 우두머리)의 직임을 맡은 노고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고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제수받았다. 8월에 임금이 존호를 받을 때 예방승지(禮房承旨)를 맡은 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되고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9월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제수되고, 10월에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병조 참판으로 옮겼다.

신유년(1741) 8월에 지방관으로 나가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가 되었는데, 임금이 능(陵)을 알현하고 돌아오는 길에 고양(高陽)에 이르러 궁시(弓矢)와 호피(虎皮)를 하사했다. 10월에 당시 정승이 표재(俵災)의 일로 논계(論啓 잘못을 따져 아룀)하여 파직되었다. - 가을에 장단(長湍)을 순시하였는데, 부사 윤경룡(尹慶龍)이 재해 보고를 사실보다 지나치게 한 일이 발각되었다. 이에 아전을 추궁하고 내사하자 윤경룡이 세도 재상 조현명(趙顯命)에게 부탁하여 조현명이 파직을 청하는 계사를 올린 것이다. - 곧이어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여 교체되었으며, 좌윤(左尹)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호조 참판으로 옮겼다.

갑자년(1744)에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여 교체되었다. 병인년(1746) 겨울에 외직으로 나가 춘천 부사(春川府使)가 되었고, 무진년(1748)에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고, 경오년(1750)에 공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무인년(1758)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제수되었는데, 임금의 특명으로 입시(入侍)하자 내시를 시켜 부축하여 전(殿)에 올라오게 하며 말씀하기를,

“경을 본 지 지금 몇 해가 지났도다.”

하고는, 앞으로 나와 용안(龍顔)을 쳐다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스스로 용수(龍鬚)를 쓰다듬으며,

“똑똑히 보이지 않소? 수염과 털이 이렇게 다 희었다오.”

하고서, 이어 전교(傳敎)를 내리기를,

“이 사람은 염담(恬淡)하여 내가 늘 가상하게 여겨 왔다. 마땅히 한(漢) 나라에서 탁무(卓茂)를 봉한 예를 본떠 특별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하여 예전부터 노인을 존대하던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경진년(1760)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제수되고 그 사이에 금오(金吾 의금부)의 총부(摠府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와 괴원(槐院 승문원)의 제거(提擧)를 겸임하였다. 무릇 한 벼슬에 거듭 제수된 것은 다 기록하지 않았다.

그해 8월 초이튿날에 세상을 뜨시니 수(壽)는 76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임금이 조제(弔祭)를 내리고, 며칠 후에 교서를 내려 돌아가신 이를 애도하고 유사(有司)에게 별도로 명하여 쌀과 포목을 더 하사하여 상사(喪事)에 쓰도록 하였다. 10월 초이렛날 광주(廣州) 초월면(草月面) 학현(鶴峴)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 계해년에 양주(楊州) 별비면(別斐面) 성곡(星谷) 술좌(戌坐)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

부군은 타고난 성품이 고결하고 담박하여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털끝만큼도 세속의 영욕을 가슴속에 담아 본 적이 없었다. 일찍이 선비의 평소 행실을 논하여 말하기를,

“그릇이나 물건 따위를 남에게 줄 경우에 반드시 이를 깨끗이 씻고 여러 겹 싸서 조심스레 만지거늘 하물며 임금에게 자신의 몸을 바치고자 하면서 먼저 자신을 더렵혀서야 되겠는가. 이는 그 임금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부군은 조정에서 벼슬한 지 30년이 되도록 전답이나 자산이 백금(百金 100냥)도 되지 않았으며, 성 아래 있는 허름한 집이 값으로 치면 돈 30꿰미에 불과했으나 죽을 때까지 거처를 바꾸지 않았다. 오직 늙은 종 하나를 두었는데 거친 밥이나마 배를 채우지 못했음에도 죽는 날까지 주인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진신(搢紳 높은 벼슬아치)들과도 왕래하는 일이 전혀 없어서, 이병태(李秉泰) · 정형복(鄭亨復) · 황재(黃榟) 등 세 분이 부군과 가장 친한 사이라 하는데도 일 년에 대개 한두 차례 오가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겉과 속이 진솔하여 격의를 두지 않았다.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예로부터 자신의 몸을 깨끗이 지키고 권도(權道)에 따라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이로 인해 명예나 이익이 따라붙을 것 같으면 이 또한 어찌 의리를 세운 본뜻이겠는가.”

하였다. 세간에 이 말을 듣고 종신토록 유감을 풀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조만간 부군이 이조(吏曹)의 관직에 제수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때마다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먼저 차지하여, 물의(物議)가 자못 비등하였다. 그러나 부군은 아무것도 못 들은 체하였다. 전법(銓法)에 당하관(堂下官)의 통색(通塞 승진 문제)은 붓을 잡은 낭관이 주관하게 되어 있다. 낭관이 후임자를 자천(自薦)할 때가 되자 이조 판서 김취로(金取魯)가 느닷없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낭관을 주시하니 낭관이 두려워 일어나 뒷간으로 나갔다. 김취로가 갑자기 부군을 홍문관 응교로 의망(擬望)하니 아전이 옛 규례를 고집하며 곧바로 승차(陞差 승진 임명)할 수 없다고 하자, 김취로가 꾸짖어 말하기를,

“낭관이 붓을 던지고 일어나 나갔으니, 오늘 승차를 의망한 것은 바로 옥당(玉堂 홍문관)의 구차(久次 오래 승진이 지체되는 자리)이다.”

하였다. 이처럼 부군이 벼슬길에서 낭패를 본 까닭은 실로 한천(翰薦) 한 가지 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다.

판서공(判書公 박사익)이 일찍이 여호선생(黎湖先生 박필주)에게 질문하기를,

“이여오(李汝五)가 저에게, ‘그대의 집안에 명사(名士)가 둘이 있는데 한 사람은 해오라기가 가을 물가에 서 있어 겉에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모습과 같고, 또 한 사람은 소나무가 아스라한 낭떠러지 위에 솟아나 넝쿨들이 타고 오르기 어려운 모습과 같다.’라고 하자, 이희경(李熙卿)이 이 말을 듣고는 참 좋은 말이라 하면서, ‘이 가운데 하나만 있어도 나약한 자에게 뜻을 세우게 할 수 있고 탐욕스런 자를 청렴하게 만들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비유로 말한 저 두 인물 가운데 누가 나은가요?”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과연 그렇겠다! 시숙(時叔)은 꼿꼿하고 정보(正甫 박필균)는 담박하지. 담박한 사람은 어리숙한 듯이 보이나 실상은 꼿꼿하고, 꼿꼿한 사람은 오만한 듯이 보이나 실상은 담박하니, 이들은 대체로 두 사람이면서도 한 몸이나 마찬가지이겠지.”

하였다. 시숙(時叔)은 참판공(參判公 박사정)의 자(字)이다.

급기야 참판공의 아들 명원(明源)이 화평옹주(和平翁主)에게 장가들어 금성위(錦城尉)로 봉해지고, 참판공이 얼마 후 돌아가시자 집안에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조정에 선 자가 없게 되었다. 부군은 등과(登科)하여 16년이 지난 뒤에도 백발의 늙은 학사(學士)로 지냈으며, 늦게서야 비로소 당상관에 올랐으니, 한미한 가문 출신의 평범한 진출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처음에는 임금의 촉망을 받고 있는 줄을 알지 못했다. 승정원에서 숙직할 때에, 밤에 임금이 부군을 불러 물으시기를,

“승지는 지금 나이가 몇이며, 집은 어디에 있는가? 왜 집을 성안으로 옮겨 살지 않는가?”

하였다. 이때 우사(右史)만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는데, 임금이 우사에게 밖으로 나가서 정명(政命)을 전달하라고 명하자, 부군이 황공하여 물러나려고 하니 임금이 갑자기 앞으로 나오라 명하고는 말씀하기를,

“존호(尊號)를 받는 것이 내가 즐겨하는 바는 아니지만 동조(東朝)에게 기쁨을 드리기 위해 여러 신하들의 청을 마지못해 따른 것인데 이제(李濟)가 소를 올려 경계의 말을 하였으므로 나는 실로 부끄러웠다. 내시들이 이것(존호를 받는 것)은 맑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하지만, 저들이 어찌 감히 조정의 논의에 간여한단 말인가. 승지는 친인척(親姻戚)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이니 바깥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

하였다. 부군이 물러나서 생각해 보니 황송하기도 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생각지도 않게 하루아침에 두 자급(資級)을 뛰어오르는 은택을 입은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규례에 따라 도승지에 오르게 되자 열이레 동안 병을 핑계 대고는 마침내 나아가 숙배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다시는 은대(銀臺 승정원)에 들어가지 않았다.

화평옹주가 처음 시집을 올 때 의식을 가례(嘉禮 사가(私家)의 혼례)와 똑같이 하여 당시에 종족(宗族)과 빈객(賓客)들이 모두 다 모였다. 그들의 생각에, 부군이 벽제(辟除)를 잡히고 초헌을 타고 와서 상석(上席)을 맡게 된다면 비단 이날에 문호(門戶)를 빛내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부마를 위해서도 빛이 나리라 여기어, 느지막에 종질(從姪) 아무개가 와서 부군에게 권하기를,

“숙부가 오시지 않으면 자못 실망하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하니, 부군은 놀라며 하는 말이,

“옹주의 집을 외인이 어찌 함부로 갈 수 있느냐?”

하였다.

얼마 후 옹주가 정안옹주(貞安翁主 박미(朴瀰)의 부인)의 사당을 알현하였는데, 정안옹주의 후손 중에 지위가 잘 알려진 사람이 사당의 문에서 예의를 갖추라는 중지(中旨)를 받은 데다, 장차 정안옹주에게 치제(致祭)하여 영광이 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부군이 병으로 오지 못하여 향(香)을 받을 자가 없어서, 마침내 치제하는 일을 중지하였다. 종중(宗中)의 여러 장로(長老)들이 모두 부군을 나무라기를,

“어찌 병을 무릅쓰고 임금의 명을 받들어서 온 집안의 은영(恩榮)이 되도록 아니 했소.”

하였다.

명원(明源)이 병이 깊어 일 년이 넘자 어의(御醫)가 밤낮으로 간호하고 친척들이 찾아와 문병을 하였으며 날마다 병세를 기록하고 보고하였는데, 유독 부군은 이상하게도 한 차례 안부도 물은 적이 없었다. 명원 역시 일찍이 서운히 여기어 원망하기를,

“우리 선대(先代)에서도 왕가(王家)와 혼인이 있었는데, 지금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도 소원하게 대하여 마치 몸이 더럽혀질 듯이 여긴단 말인가. 유독 우리 선친께서 소싯적에 그 고아 신세를 비호해 준 일은 생각지도 않는가.”

하였다.

종질(從姪) 아무개가 일찍이 부군에게 와서 말하기를,

“숙부께서는 밖으로는 산림(山林)의 명망을 짊어지고 있고 안으로는 왕실의 친척과 관계를 맺고 있어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앉아서 풍속(風俗)을 진정시킬 수 있으니, 지금의 국시(國是)를 쥐고 있는 자가 어느 누군들 옷깃을 여미고 받들지 않겠습니까? 다섯 사람이 설원(雪寃)되지 못하고 세 흉적이 토죄(討罪)되지 못하고 있다고 하여 숙부께서 삼사(三司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에 절대로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여러 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새로이 성상의 은총을 받고 앞길이 확 트여 세도(世道)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저 탕평파(蕩平派)의 신하들까지도 우리 집안의 동정을 몰래 엿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니, 부군이 깜짝 놀라며,

“너는 본래 우둔한 자인데, 누가 너에게 이 말을 가르쳐 주었으며, 산림이란 너에게 있어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위로는 어진 부형에게 누를 끼치고 아래로는 어린 자식을 망치려 들려고 하느냐? 이른바 세도라는 것이 어찌 너처럼 일개 늙은 음관(蔭官)이 알 수 있는 바이겠느냐.”

하니, 아무개가 무색하여 말하기를,

“숙부께서 답답하게도 성벽을 마주하고 앉아 여론을 접하지 않으시기에 특별히 와서 진심을 토로한 것인데, 도리어 성을 내신단 말씀입니까.”

하자, 부군이,

“돌아가 지금 세도를 행하는 자에게 말하라. 숨바꼭질하듯이 몸을 숨기는 것을 도깨비〔罔兩〕라 이르고, 구차스레 득실을 걱정하는 자를 비부(鄙夫 비열한 인간)라 이른다. 나는 진실로 답답하거니와, 어찌 너처럼 자질구레한 자 때문에 지조가 무너지겠느냐. 세상에 공정한 여론이 있다면, 지난번에 내가 갑자기 승진한 것에 대해서 논박을 달게 받을 것이다.”

하였다. 이는 추측컨대 당시 사람들이, 부군이 이미 누차 중지를 어긴 줄을 알지 못하고 근거 없는 소문에만 주목하여 남몰래 청탁할 일이 있게 되자 임금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가를 타진해 본 것인 듯하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은 본시 세상에 영합하여 뜻을 이루었는데, 임금의 마음이 한번 옮겨지고 정대한 여론이 마침내 펴지는 날이면 자신도 한 패거리로 몰려 빠져나오지 못할 것을 다시 두려워하여, 남들과 다르다는 점을 조금이라도 보이려고 하였다. 그래서 부군이 홀로 세상과 영합하지 않아 예전에는 김씨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얼마 전에는 또 요상(僚相)이 모함을 한 사실을 생각하고는, 자주 부군에게 관심을 보였으나 부군은 그의 언론이 항상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을 평소에 비루하게 여겨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이에 마침내 여호선생을 천거하여 이조 판서를 삼았으니, 이것이 바로 그가 세상에 영합하는 술책이었다. 그런데 임금은 본래 생각하기를 ‘산림에 묻혀 뜻을 닦는 자는 세상에 쓰이기에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잠깐 나왔다 곧바로 떠나곤 하여 절차만 번거롭게 할 뿐이다. 게다가 조야(朝野)가 편안하지 못한 것도 대개는 이에 연유한다.’고 하였던 터였다. 하지만 이미 초빙이 되었으므로, 여호선생이 부군(府君)의 집에 와서 처소를 정하니, 처소에 모이는 자가 매일 조정의 절반은 되었다. 정승 조현명(趙顯命)이 찾아오자, 방과 대청이 협착하고 누추하여 여러 조신(朝臣)들이 피해 있을 곳이 없었다. 이에 조현명이 여러 조신들에게 읍을 하고 자리에 나아가 말하기를,

“오늘은 선생님을 모시고 강론하고 싶은 대목이 있어 여러 분들과 더불어 함께 듣고자 하니, 조정의 예(禮)로써 서먹서먹하게 대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소매 속에서 《대학(大學)》을 꺼내 혈구장(絜矩章)을 강론하기 시작하자 부군이 웃으며,

“상공(相公)의 혈구(絜矩)는 본디 사슴 가죽으로 된 것인데 어찌하여 사슴을 타고 와서 강론하려 드시오?”

하자, 조현명이 히히 웃다가 얼굴빛이 변하면서 그쳤다. 이날 구경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모두들 부군을 위해 걱정하였다.

홍계희(洪啓禧)는 척분(戚分)이 있어 날마다 선생을 모시고 잤는데, 부군이 몰래 선생에게 말하기를,

“은(殷) 나라 수레와 주(周) 나라 면류관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아마도 순서가 바뀐 듯합니다.”

하자, 선생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부군이,

“ ‘말재주 있는 사람을 멀리 하라〔遠佞人〕’는 대목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홍계희가 밤에 부군에게 의견을 묻기를,

“어제 여호선생이 등대(登對)하셨을 적에 임금께서 친히 손을 잡으시고는 개정(開政)할 것을 독촉하셨으니 한번 명(命)을 받드는 것이 그만둘 수 없는 일인 듯싶습니다만, 부제학 자리를 만약 신통(新通 새 인물을 후보로 결정함)한다면 피차간에 어려운 점이 있어 중통(重通)만 못합니다. 그렇다면 김상로(金尙魯)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의 말이 비록 남을 위하는 것 같지만 본심은 실로 자기가 맡으려는 것이었다. 이에 부군이 말하기를,

“이른바 집이 가까워도 사람은 멀다는 격이군요. 그대는 왜 곧장 이조(吏曹)에 가서 그렇게 말하지 않는 거요?”

하였다. 이튿날 홍계희가 우암(尤庵)의 고사를 다분히 끌어대어 여호선생에게 넌지시 말하자, 부군이 버럭 소리를 치기를,

“우암이 정사(政事)를 했다면 김상로는 제주 목사가 되고 정익하(鄭益河)는 부령 부사(富寧府使)가 되었을 것이오.”

하자, 좌중 사람들이 몸이 오싹하여 서로 쳐다보았다. 이때 홍계희는 벌써 여러 김씨(金氏)들에게 달려가 고자질하여 부군을 위태롭게 하고자 꾀하고, 나아가 선생에게까지 위험이 미치게 하려 하였다. 그러자 떠들기 좋아하는 자들이 제주 목사를 부풀려서 강계 부사(江界府使)니 영월 부사(寧越府使)니 하면서 다투어 상대를 지목하니, 당로자(當路者)들이 모두들 부군을 뼈에 사무치도록 원망하였다. 그리하여 여호선생이 직접 차자(箚子)를 올리고 진신(搢紳)들이 연명(聯名)으로 상소하여 유봉휘(柳鳳輝)와 조태구(趙泰耈) 등을 토죄(討罪)할 때 유독 김상로 형제만 참여하지 않았으며, 박문수(朴文秀)가 상소를 올려 여호선생을 쫓아냈을 때에 여러 김씨들의 힘이 작용하였으니, 이는 다 홍계희가 한 짓이었다.

9월에 비로소 유봉휘, 조태구 등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자 세간에서 부군을 편론(偏論)의 도가(都家)로 지목하는 일이 있게 되니, 부군은 스스로 마음이 편치 않아 지방으로 나가기를 구하여 춘천 부사(春川府使)가 되었다. 방어영(防禦營)을 철원(鐵原)으로 옮겨 설치한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며, 두어 달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화평옹주(和平翁主)가 죽자 임금이 갑자기 왕림하시니 백관들이 허둥지둥 걸어서 뒤를 따랐다. 중지(中旨)가 내리기를,

“시가(媤家)의 존속(尊屬) 한 사람이 입장(入帳)하고 상사(喪事)를 감독하게 하라.”

하였으나, 부군이 성명(成命 공식 왕명)이 내리지 않았다 하여 병을 핑계 대고 가지 않았다. 상이 이틀 밤이 지나도록 환궁하지 않아 대신들이 누차 환궁할 것을 청했으나 거듭 엄한 분부만 듣고 모두 문밖에서 대기하였다. 어떤 사람이 부군을 원망하면서,

“이때가 어느 때인데 정(情)으로 보나 의(義)로 보나 어찌 유독 오지 않는단 말인가.”

하였다. 장차 명정(銘旌)을 설치하려고 부군에게 와서 글씨를 요청하자, 부군은 병이 위독하다고 핑계 대고서 쓰지 않았다. 이어 붉은 비단을 그대로 돌려보내면서, 도위(都尉 박명원)에게 편지를 써 나무라기를,

“듣자니 삼공(三公)이 감히 물러가지 못하고 마구간 사이에 줄지어 있다 하니 이게 무슨 거조(擧措)란 말인가. 오늘날 조정이 아무리 비루하다 한들 어찌 너희같이 조의(朝衣)와 조관(朝冠)을 갖추고 도탄(塗炭)에 앉아 있는 무리들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어이해 제 머리를 깨부수고 제 목을 찌를 듯이 하여 임금의 마음을 빨리 돌리지 않고 내시들과 함께 앉아서 겨우 눈물이나 흘리고 있단 말이냐?”

하였다. 이때 군사 호위가 너무도 엄하여 뭇 신하들을 들여놓지 않았으므로 도위가 실로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하다가, 급기야 이 편지를 보고서 어찌할 바를 몰라 뜰에 내려와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니, 임금이 몹시 성을 내며,

“너도 또한 조정 신하들을 흉내 내느냐? 파직시켜라, 파직시켜라!”

하였다. 얼마 후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파직을 시킨다면 결국 맹만택(孟萬澤)의 경우와 같은 꼴이 될 것이다.”

하고는, 곧바로 그 명을 도로 거두도록 명하였다. 이때 임금이, 부군이 도위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말을 어렴풋이 듣고는 외판(外辦)할 것을 하명하니, 대신이 그제야 비로소 진현(進見)할 수 있게 되어 바야흐로 진언을 드리려 하였으나, 임금이 갑자기 신사철(申思喆)을 꾸짖으며 도로 다시 편전(便殿)의 문을 닫아 버렸다. 그제야 비로소 임금이 치미는 울화가 있어서 다른 일에다 성을 낸 것을 조정의 안팎에서 알게 되었다.

당시에 사대부로서 처신에 능란한 자들에게는 기회를 엿보기에 모든 것이 좋은 때였으나 홀로 부군만이 꿋꿋이 자신을 지켜 조금도 자리를 옮겨 앉지 않았으니, 19년 동안 한산직(閑散職)을 전전한 것만 보아도 그 본말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영욕(榮辱)의 사이에도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았고, 방촌(方寸 마음)의 사이에 담연(澹然)하여 얽매임이 없었던 것은 오직 부군만이 그러했으니, 비록 당세에 부군을 좋아하지 않던 이들도 또한 청신(淸愼)하고 개제(愷悌 온화함)하다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여주 이씨(驪州李氏)로 우윤(右尹) 응(膺)의 따님이다. 3남 1녀를 낳으니, 아들은 사유(師愈), 사헌(師憲), 사근(師近)인데, 사근은 현감을 지냈으며 여호선생에게 출계(出繼)했다. 딸은 판관(判官) 어용림(魚用霖)에게 출가했다. 손자는 희원(喜源)과 지원(趾源)인데 지원은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손녀는 감역(監役) 이현모(李顯模)와 현감 서중수(徐重修)에게 출가했는데, 다 큰아들 소생이다. 진원(進源)은 일찍 죽고 수원(綏源)은 부사요, 손녀는 황형(黃馨)에게 출가했는데, 사근(師近)의 소생이다. 외손(外孫)에는 군수 어재소(魚在沼)와 어재운(魚在雲)이 있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불초 손(孫) 지원이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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