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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서계서원 춘향제'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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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5-17 16:47 조회6,4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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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서원 춘향제 참석

지난 15일(토요일)에 경남 산청군 산청읍 지리 덕천마

을 에 소재한 서계서원 춘향제를 산청유림과 덕계 오

건선생의 후손, 용호 박문영선생 후손등 60여 명이 올

렸으며, 이 향사

에는 반남학당회원 22명이 참석하였다.

반남학당회원

찬주(반남학당 회장), 승원(경기지회장). 군서(부윤공

도유사)
용우(서계공종손)부부, 만춘(오창공종손)부부,

문양, 승조, 붕서, 찬우(세양공파), 승석, 보서(서포공

파),상서(길주공파), 찬혁. 찬오(부윤공파), 찬혁(약창


공파),
찬기(숙천공파), 시우(남곽공파). 태서(남일공

파),
찬문(춘당공파),




서계서원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지리 덕촌마을에 위치한 서계서원은 덕계 오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 덕계 오건(吳健)의 학문과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1606년(선조 39)에 한강 정구(鄭求)를 비롯한 사림이 창건하였다. 1677년(숙종 3)에 서계로 사액(賜額)받고 선현을 배향하고 지방 교육을 담당했으며,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21년에 복원되었다.

경내는 3칸의 창덕사(彰德祠)를 비롯하여 4칸의 강당, 3칸의 부속강당, 각 2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대문, 3칸의 고사, 4칸의 태실(胎室)로 구성되어 있다. 신성한 공간인 창덕사에는 오건을 주향으로 봉안하고 왼쪽에 오간(수오당)박문영(용호공), 오른쪽에 오장(吳長)의 위패를 각각 봉안하여 해마다 음력 4월 2일에 사림들이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건물 구조는 전형적인 서원의 배치 형태로서 솟을대문인 입덕루(入德樓)를 들어서면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고, 그 뒤 중앙에 강당인 서계 서원이 있다. 강당 뒤로 창덕사가 있고 덕천재(德川齋)와 장판각(藏版閣), 비각이 축을 이루고 있다. 강당은 원내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 강론 장소로 이용되었다.


용호
(龍湖) 박문영(朴文) 선생

용호공(龍湖公) 박문영(1570~1623) 선생은 반남박씨 14세손으로. 이름은 문영(文英)이며 용호(龍湖)는 그 호(號)이다. 조선 선조 39년 丙午生員 에 합격하였다. 그의 조상인 교리(郊理) 박맹지(朴孟智)의 5대손이요, 아버지인 직장(直長) 박행(朴荇)의 아들로서, 1570년 산음현 효촌(山陰縣 曉村: 산청군 생초 어서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질이 순미하고 효성이 있어 애친(愛親)함과 경장(敬長)함이 성인과 다름이 없었다. 글 재주 있어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을 스승으로 섭겨 경자사서(經子史書)를 널리 배워 문장이 띄어났다. 특히 의리(義理)에 밝았고 인정이 두터웠으며 부모께 효성이 지극하였고, 불우한 사람을 도우는데 성력(誠力)을 아끼질 않았다.

그러므로 당시의 중망(重望)을 크게 받았으며, 동문(同門)으로서 명유(名儒)들인 오사호(吳思湖: 長), 권동계(權東溪: 濤), 권장령(權掌令: 潗)등과는 교도(交道)가 가장 밀접하였다.

1592년(선생 23세)에 임진왜란을 당하자 의병창의에 종군하여 동료(同僚)들과 산산히 흩어졌는데 그의 어머니 풍천 노씨가 무주(茂朱)로 피난 중 왜군의 위협이 질박했을 때, 마침 오사호(吳思湖)의 보호로 무사한 뒤 7년만인

1599년 오사호와 진안에서 처음 만나 서로 전쟁사를 되돌아 보곤 하였다.

용호 박선생은 전후수습에 바빴었고 학문에 더욱 힘써 1608년(선조39년 병호)에 성균관의 생원(生員)이 되었다.

이때 선조왕이 광해군(光海君)으로 세자(世子)를 삼으려 했는데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탄생한 뒤로부터 선조왕은 세자를 바꾸려 하였음에 일부의 조신들이 정한 세자를 바꿔서는 안된다고 상소를 하자는데에 용호선생을 소두(疏

頭)로 함을 거절하고 참여는 하였고 소두에는 하성(河惺)이 앞장섰던 것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왕이 된 뒤 하성은곧 장수현감(長水縣監)이 되고 용호선생에게는 공신록권(功臣錄券)과 증조와 다른 종족에게는 증직록권(贈職錄券)

을 주는 것을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그런데 광해군을 받드는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邇瞻) 등이 정권을 전횡하여 급기야는 영창대군과 김제남(金悌男: 선조의 장인, 인목대비 부친)과 그 아들 3형제를 역적죄로 몰아 죽이고 인목왕비를 폐비(廢妃) 하는등 패륜

(悖倫)행위를 하였다. 그래서 세상인심은 졸변하고 선비들은 광해군의 불륜을 규탄하는 소장을 곳곳에서 내게 되었다. 이때 용호선생은 평생에 악인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는 지절(志節) 인데도 정인홍이 보낸 편지를 받고 그 편지쪽에 곧 "가야의 늙은 도적놈은 왜 빨리 죽지도 않느나"("伽倻老賊 胡不遍死")라고 크게 써서 돌려 보내었다. 그랬으나 정인홍은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 그리고 정인홍은 문권이 함양 정일두(鄭一) 선생 서원(書院)에 많이 있는 것을 끌어내어 불살랐다. 또는 정동계(鄭東溪: 蘊)선생이 정인홍을 규탄한데 대하여 그를 제주도로 귀양 보내는 것을 신원(신원)하기 위해 영남 유림대표로 오사호가 글을 내었는데 또한 오사호 마저 황해도로 귀양을 보내어 그곳에서 죽게 하였다. 이에 용호선생은 오사호의 유시(遺尸)를 반장(返葬)하는데 힘을 다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용호선생의 절의와 우정이 얼마나 높았는가를 배워고 남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용호선생은 각 유의 향교, 서원 전후 복구에 힘써 유학진흥에 큰 공헌을 이루었으며 그 능날한 문장이 문집에 빛나게 담겨 있어 그 사상과 도학을 오늘에도 살펴볼 수 있다.

선생의 산수를 사랑하던 강정(江亭)이 생초면 경호강 상류 합강(合江) 마루터에 서 있고, 그의 유덕을 추모하여 산청읍 덕촌 서계서원(西溪書院)에 배향으로 후손과 유림이 향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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