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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공(휘 지원)의 간략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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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원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0-05-16 10:59 조회3,6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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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925번 "연암선생을 바라보는 눈"이라는 글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우리고 알고 있는 역사의 기록 중에는 잘못 알려진 내용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특히 각종 인물사전에 등재된 인물들에 관한 기사에는 상당한 오류가 발견됩니다.

이는 누군가(전문가???)의 무심한 실수 또는 의도적인 조작에 의해 역사적 사실이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될 것입니다.

세보의 기록에 의하면, 연암공의 부친 휘 사유는 숙종 29년 계미년(1703년)에 태어나서 영조 43년 정해년(1767년) 6월 22일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다음은 연암공(휘 지원)의 간략 행적입니다. (퍼온 자료. 약간 편집).

연암공(휘 지원)의 간략 행적.

1.
영조13년(1737: 정사, 乾隆21년) 2월 5일. 서울 盤松坊 冶洞에서 태어나다.

2. 영조28년(1752: 임신, 乾隆17년) 16세. 관례를 올리다. ○處士 遺安齋 李輔天의 딸과 혼인하다. ○처삼촌인 李亮天에게 「史記」를 배우고 〈李忠武公傳〉을 짓다.

3. (00세 - 00세). 李胤永에게 「周易」을 배우다. ○渼湖 金元行을 찾아 뵙다. ○李弘儒, 黃昇源, 洪文永 등과 科業을 익히며 때때로 성균관시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다. ○20대부터 30대 초반까지 〈兩班傳〉, 〈穢德先生傳〉 등 9편의 傳을 지어 세태를 풍자하다.

4. 영조35년(1759: 기묘, 乾隆24년) 23세. 10월. 모친상을 당하다.

5. 영조36년(1760: 경진, 乾隆25년) 24세. 8월. 조부 朴弼均의 상을 당하다.

6. 영조37년(1761: 신사, 乾隆26년) 25세. 北漢山 암자에서 독서하다.

7. 영조42년(1765: 을유, 乾隆30년) 29세. 가을, 兪彥鎬, 申光蘊과 금강산을 유람하고 〈叢石亭觀日出〉詩를 짓다.

8. 영조43년(1767: 정해, 乾隆32년) 31세. 6월, 부친상을 당하다. 서울 蘆原에서 장사 지내려 하였으나 李商芝의 집안과 山訟이 벌어지다.

9. 영조46년(1770: 경인, 乾隆35년) 34세. 監試에 장원하다. 會試에 응시하였으나 試券을 제출하지 않다.

10. 영조47년(1771: 신묘, 乾隆36년) 35세. 과거를 단념하고, 李德懋, 李書九 등과 松都, 平壤, 天磨山, 俗離山, 伽倻山, 丹陽 등지를 유람하다. ○開城을 유람하면서 연암골을 발견하고 은거하기를 기약하여 ‘燕巖’이라 자호하다.

11. (35세 - 41세). 李敏輔, 尹得觀, 金相定, 金履中, 沈念祖, 金魯永 등과 교유하다.

12. 정조1년(1777: 정유, 乾隆42년) 41세. 장인 李輔天이 졸하자 제문을 짓다.

13. 정조2년(1778: 무술, 乾隆43년) 42세. 洪國榮이 노린다는 白永叔의 말을 듣고 가족을 거느리고 開城 燕巖으로 은거하여 저술에 힘쓰다. ○開城 유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쳐 文風을 일으키다. ○留守 兪彥鎬의 도움을 받다.

14. 정조4년(1780: 경자, 乾隆45년) 44세. 서울로 돌아와 처남 李在誠의 집에 거처하다. ○三從兄인 錦城尉 朴明源을 따라 중국에 다녀오다. 이때의 見聞과 太學에 머물며 중국의 인사들과 토론한 내용을 「熱河日記」로 지었는데 당시 사대부들간에 널리 전파되어 명성을 얻다.

15. (00세 - 00세). 소론인 李匡呂와 교유하며 문장을 토론하다. ○三浦의 洗心亭에 거처하며 李德懋, 朴齊家, 柳得恭 등과 교유하다.

16. 정조7년(1783: 계묘, 乾隆48년) 47세. 절친했던 湛軒 洪大容을 哭하다. 장사를 돌보고 묘지명을 짓다.

17. 정조10년(1786: 병오, 乾隆51년) 50세. 兪彥鎬의 천거로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다.

18. 정조11년(1787: 정미, 乾隆52년) 51세. 1월, 부인 이씨의 상을 당하다. ○7월, 백형 朴喜源의 상을 당하다. ○子婦 이씨의 상을 당하다.

19. 정조12년(1788: 무신, 乾隆53년) 52세. 맏딸인 李鍾穆의 처가 죽다. ○서울 濟生洞으로 거처를 옮기다.

20. 정조13년(1789: 기유, 乾隆54년) 53세. 6월, 평시서 주부가 되다. 이후 사복시 주부, 의금부 도사, 사헌부 감찰, 齊陵 令이 되다.

21. 정조15년(1791: 신해, 乾隆56년) 55세. 한성부 판관이 되다. ○安義 縣監에 제수되다.

22. 정조16년(1792: 임자, 乾隆57년) 56세. 상(上: 정조 임금)이 文體反正을 명할 때 「熱河日記」가 문체를 변화시킨 張本임을 지적하고 南公轍을 통해 醇正文으로 自訟書를 지을 것을 명하다. 이에 남공철에게 속죄하는 내용의 답서를 보내니, 상이 이 편지를 보고 그 문장에 감탄하다.

23. 정조17년(1793: 계축, 乾隆58년) 57세. 王羲之의 蘭亭故事를 본따 李在誠, 사위 李鍾穆, 李謙秀 등과 술을 마시며 글을 짓다.

24. 정조18년(1794: 갑인, 乾隆59년) 58세. 고을 내 老人加資를 받은 이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다. ○水車, 베틀, 물레방아 등을 제작하여 사용하게 하다.

25. 정조20년(1796: 병진, 嘉慶1년) 60세. 안의 현감을 그만두고 軍職을 받아 상경하다. ○兪彥鎬를 곡하다. ○桂山洞에 벽돌로 초당을 짓고 ‘叢桂書塾’이라 이름짓다. ○제용감 주부, 의금부 도사, 懿陵 令이 되다.

26. 정조21년(1797: 정사, 嘉慶2년) 61세. 沔川 郡守가 되다. 하직하러 입시했을 때 上의 명으로 〈書李邦翼事〉를 지어 올리다. ○湖西의 선비인 姜幼安, 羅烈, 柳訸 등을 초청하여 교유하다.

27. 정조23년(1799: 기미, 嘉慶4년) 63세. 農書를 구하는 교서에 응해 「課農小抄」를 지어 올리다. 흉년이 들자 진휼을 행하다. ○黃江書院에 韓元震을 배향하는 제사를 지낼 때 집사로 차출되다.

28. 정조24년(1800: 경신, 嘉慶5년) 64세. 9월, 襄陽 府使가 되다.

29. 순조1년(1801: 신유, 嘉慶6년) 65세. 관내의 神興寺가 宮屬과 결탁하여 폐단을 끼치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오다.

30. 순조2년(1802: 임술, 嘉慶7년) 66세. 부친의 묘를 抱川으로 이장하려다 兪漢雋과 山訟이 생기자 楊州 星谷으로 이장하다. 이로 인해 울화병이 생기다.

31. (66세 - 69세) 말년에 중풍으로 몸이 마비되어 글을 짓지 못하다.

32. 순조5년(1805: 을축, 嘉慶10년) 69세. 10월 20일, 卒하다. ○12월 5일, 長湍 大世峴에 장사 지내다.

33. 고종37년(1900: 경자, 光武4년). 金澤榮이 全史字로 原集 6권 2책을 간행하고 다음 해에 續集 3권 1책을 간행하다.

34. 순종4년(1910: 경술, 隆熙4년). ‘文度’로 시호를 내리다.

35. 1911: 신해. 崔南善이 「熱河日記」를 간행하다.

36. 1916: 병진. 金澤榮이 中國 南通에서 7권 3책으로 재편하여 간행하다.

37. 1932: 임신. 朴榮喆이 서울에서 鉛活字로 17권 6책을 간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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