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항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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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서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0-05-06 19:29 조회3,777회 댓글0건본문
찬성공휘세해묘지(贊成公諱世楷墓誌)
아들 태항(泰恒)이 짓다.
선군(先君)의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세해(世楷)며, 자는 여학(汝學)이니, 반남인(潘南人)이다. 그 선계(先系)는 신라의 국조(國祖)였으며, 고려 말에 직제학(直提學) 상충(尙衷)은 깊은 학문과 곧은 절개로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추앙과 존중(推重)을 받았다. 우왕 때 북쪽의 원나라 사신을 물리치라고 청하였다가 간신 이인임(李仁任)에 거슬려서 형장(刑杖)을 맞고 유배를 가다가 도중에서 돌아가셨다. 세상에서 반남선생(潘南先生)이라고 불렀는데 이조(李朝)에 들어와서 문정공(文正公)으로 증시(贈諡)되었다. 그의 아들로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 평도공(平度公) 은(訔)은 태종을 도와 공훈(功勳)이 국사(國史)에 올랐다.
5세만에 사간(司諫)으로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문강공(文康公) 소(紹)는 선군의 고조부이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명성이 같았으며, 김안로(金安老)의 재입각(再入閣)을 절대 반대하다가 도리어 배척을 받아 영남으로 유배 갔다가 돌아가셨는데, 세상에서 야천선생(冶川先生)이라고 불렀다. 증조부 응복(應福)은 대사헌(大司憲)을 지냈고,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된 반천부원군(潘川府院君)인데, 인자하고 후덕하며 독실하여 사암공(思庵公) 박순(朴淳)이 칭찬하였다. 조부 동열(東說)은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후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추증되었다.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세상의 추앙과 존중을 받았으나, 조정이 혼란한 광해군 때 은퇴하여 세상을 마쳤으니, 사람들은 남곽선생(南郭先生)이라고 하였다.
아버지 호(濠)는 젊은 시절에 재상(宰相)이 될만한 인물로 명망을 받고, 공사(公事)에 전력하여 여러 군부(郡府)와 제감(諸監)을 역임하였다. 만년(晩年)에 수직(壽職)으로 첨추(僉樞)가 되었고, 그 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문정공(文貞公) 흠(欽)의 따님이다.
선군은 광해군 7년 을묘년(1615) 8월 23일에 태어났다. 4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의 양육을 받았으나 허약해서 병치레가 잦았다. 외조부 문정공이 불쌍하게 여겨 때때로 안고 오라고 시키고는 찬찬히 드려 보다가, “이 아이는 장차 귀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계유년(1633) 4월에 지평(持平) 임위(林瑋)의 댁에 장가를 들었다. 임공은 나주(羅州) 회진(會津)출신인데, 학문과 덕행으로 소명(召命)을 받고도 출사하지 않으니 선군이 그에게 의지(依持)하셨다.
정축년(1637)에는 우연히 병에 걸렸는데, 그것이 반위증(反胃症)이 되니, 그때부터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손님도 사절하고서 섭생에만 전심하셨다.
계사년(1653)에 아버지인 판서(判書) 부군(府君)께서 임지인 남원(南原)에서 상처(喪妻)를 당하여 영암(靈岩) 독치(纛峙)에서 장례를 지냈다. 상을 치른 뒤에 서울 집으로 돌아와서 선군으로 하여금 가까이 살면서 성묘하게 하니, 드디어 회진촌(會津村)에 집을 지어 기오(寄傲)라는 현판을 걸고서 여생을 보내기로 하였다.
정유년(1657) 11월에 계비(繼妣) 윤부인(尹夫人)이 돌아가시자, 선군은 추울 때 쉴틈없이 곡(哭)을 하느라 전부터 앓던 병이 심해져서 위독하다가 겨우 소생하였다.
경자년(1660)에 탈상을 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요양을 하였다.
정미년(1667) 11월에는 아버지 상을 당하고 여러 해 병으로 지내자, 얼굴이 수척하고 기력이 쇠약해졌다.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다고 하였으나 다행히 무사하게 상을 마치고 돌아오셨다.
을축년(1649)에 사산감역(四山監役)으로 임명을 받고도 고사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계유년(1693) 9월에 아들 태항(泰恒)이 사서(司書)가 되어 외람되게도 귀향하여 부모님을 봉양(奉養)하려는 사정(私情)을 말씀드렸다. 왕께서 윤허하시고 특히 하교하시되, “사서(司書) 박태항(朴泰恒)은 여든 살의 부모가 모두 살아있으니, 인가(人家)에 희귀한 일이다.”라고 하시고는 본도(本道)로 하여금 옷감과 음식물을 넉넉히 주게 하였다. 이어서 또 하교하시되, “태항(泰恒)의 부친(父親)을 특별히 품계를 올려라.”고 하셨으니, 실로 세상에 드문 은전(恩典)이었다. 그래서 선군이 드디어 첨추(僉樞)로 제수를 받았다.
갑술년(1694)에는 만 80세로써 가선(嘉善)으로 승진하여 동추(同樞)에 제수되었다.
병자년(1696)에는 왕이 근신들의 끊임없는 진언으로 야천선생(冶川先生)의 시호를 내리라고 명령하셨다. 제사를 드릴 때 선군은 장방(長房)으로서 야천 선조를 사당으로 모시기 위해 신주를 받들었는데, 90세의 노령(老齡)으로 왕의 사제관(使祭官)을 영접하였다. 주선할 때에는 영접하는 예를 다하여 조금도 나태한 기색이 없으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크게 감탄하였다.
숙종 24년 무인년(1698) 정월에 병이 점점 깊어져 7월 14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84세였다.
아아! 슬프다. 9월에 반남(潘南)의 봉현(蜂峴)에 있는 선조 호장공(戶長公) 응주(應珠)의 묘소 동쪽 기슭에 가장(假葬)하였다가 경진년(1700) 8월 서쪽 능선의 모친(母親) 묘소 아래로 이장하였다.
선부군은 몸이 날씬하여 고상하게 보이고 재능과 인품이 높고 단정하며 의지와 기개가 뛰어나 대가의 풍모가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병으로 출세(出世)에 대한 희망을 끊고 시골에서 은거하여 병으로 늙어 가다가 말년에 와서 조금 덜 하셨다. 때때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평생의 일을 술회하면서 다음과 같이 탄식하셨다. “나는 나면서부터 운명에 원수가 맺혔는지 어릴 때 어머니를 잃어 돌봐 주시는 은택도 입지 못하였다. 커서는 위병(胃病)을 앓다가 출세하려는 이상도 가지지 못하였으며, 사람과 귀신 사이를 드나든 지가 수십 년이 되었다. 엄동설한에 두 차례나 천리 밖에서 상을 치를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 죽는다고 말하였다. 그래도 살아남아 지금까지 왔으니, 비로소 사람의 생사는 정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불초한 자식들을 돌아보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법도(法度) 있는 가문에 태어났으나, 일찍부터 병 때문에 모든 것을 스스로 끊어버렸다. 그래서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린 것을 항상 마음의 통한으로 여겼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나의 마음을 유념해서 자신의 몸을 잘 다스리고 조상을 모시는 일을 잘하여 우리 선조를 더럽히지 않도록 하라.”
처음에 판서부군(判書府君)께서 남곽선생(南郭先生)의 묘비를 세우려고 비석을 다듬어 우거(扶寓)에 운반하여 놓으려 하였으나, 때를 못 만나 세우지 못했다. 선군께서 “선인(先人)의 뜻을 잇는 것이 나의 책임이다.”라고 하시고 드디어 장인(匠人)을 불러서 비석을 새겼다. 그때 연세는 이미 71세였지만, 친히 감독하시는 노고를 꺼리지 않으셨다. 아아! 비록 늙고 병중이라도 경영하시는 것은 모두 선조를 받드는 도리와 후대에 너그럽게하는 법도로써 위로는 정성드려 공경(恭敬)을 다하고 아래로는 가르침을 엄하게 하였으니, 연세는 높아도 지조(志操)와 행실은 더욱 굳으셨다.
친족 사이를 화목하게 하고 곤궁한 사람을 불쌍하게 여겨 재물을 아끼지 않고 도와주었으며, 남을 사랑하고 구제할 때에는 항상 미치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그래서 한 집안에서 도움을 받아 가족을 이룬 사람들은 선군의 장사 때에 모두 상복을 입고 그 덕에 보답하였다.
선비(先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로 추증된 임씨(林氏)로, 명망 있는 나주(羅州) 지(旨)의 현손이고, 정자(正字) 복(復)의 증손이며, 승지(承旨)에 추증된 류호공(柳湖公) 협(悏)의 손녀이며, 참봉인 나주 오언표(吳彦彪)의 외손녀이다. 병진년(1616) 1월 23일에 태어났으니, 자질이 현숙하고 법도가 거룩하여 군자와 해로함이 마땅했다. 회혼례(回婚禮)를 올리시고 갑술년(1694) 2월 22일에 돌아가셨다. 3월에 봉현(蜂峴)의 국내(局內)에 가장(假葬)했다가 을해년(1695) 10월 25일에 서쪽 임좌(壬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선군은 돌아가신 7년 뒤 을유년(1705)에 가의대부(嘉義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추증되었고, 경종 임인년(1722)에 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다. 또 영조 을묘년(1735)에 숭록대부(崇祿大夫)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되었는데, 선비(先妣)도 따라서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되었으니, 다 불초한 나의 추은(推恩)인 것이다.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이조참판에 추증된 태우(泰宇)이고, 차남은 진사에 급제하여 함열현감(咸悅縣監)이 된 태형(泰衡)이며, 막내는 문과에 급제하여 현재 판돈녕(判敦寧)이 된 불초한 나이다. 장녀는 참봉인 오익서(吳翼瑞)에게, 차녀는 진사인 임치원(任致遠)에게 출가하였다.
태우(泰宇)는 집의(執義) 윤형성(尹衡聖)의 딸에게 장가갔는데, 아들 필원(弼元)ㆍ필정(弼貞)은 모두 진사이고, 딸은 송경석(宋慶錫)ㆍ고한경(高漢慶)【남행내승(南行內乘)】ㆍ이광복(李匡福)의 아내가 되었다. 필건(弼乾)【동지(同知)】ㆍ필곤(弼坤)ㆍ필빈(弼贇) 3자(子)가 더 있다.
태형(泰衡)은 김제(金濟)의 딸에게 장가갔는데, 아들은 필교(弼敎)【전함흥판관(前咸興判官)】이며, 딸은 현령(縣令) 이한좌(李漢佐)의 아내가 되었다. 뒤에 심약수(沈若洙)의 딸에게 장가갔는데, 아들은 필경(弼敬)ㆍ필계(弼啓)ㆍ필민(弼敏)【생원(生員)】이며, 딸은 직장(直長) 이창보(李昌普)의 아내가 되었다.
불초는 현령(縣令) 유빈(柳彬)의 딸에게 장가갔는데, 아들은 필조(弼朝)【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ㆍ필한(弼韓)【경릉참봉(敬陵參奉)】ㆍ필간(弼幹)【진사와 문과에 급제하여 현재 정언(正言)】이다.
사위 오익서가 나은 아들은 탁(鐸)ㆍ선(銑)이고, 딸은 허부(許溥)ㆍ김준갑(金俊甲)ㆍ박성집(朴聖緝)의 아내가 되었다. 사위 임치원(任致遠)의 계자(繼子)는 찬(瓚)이다. 내외의 자손은 100여 명이 되어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아아! 불초는 못나서 효성을 다해 봉양하지 못했고, 상을 당해서도 예를 다 갖추지 못했다. 장례를 치러 영원히 떠나보낸 지가 이미 30여 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묘지문을 짓지 못한 것은 감히 늦추려는 것이 아니라 기다린 것이니, 문충공(文忠公) 구양수(歐陽修)에게 배운 것이다. 문충공은 그의 부친을 상강(瀧岡)에 장사한 지 10여 년 뒤에 비로소 묘표문(墓表文)을 썼다. 그 글에 “선행에 대해 보답이 없는 것은 아니나 빠름과 늦음이 차이가 있으니, 이것은 이치의 당연함이다.”라고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선군께서 선행을 쌓으신 성덕(盛德)은 비록 그때 관직을 받아 현양되는 영광을 보지 못하셨으나, 진실로 세 왕조에 걸쳐 은총은 받으셨으니, 이것만도 후세에 자랑할 만하다. 불초가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선군의 재덕으로써 세상에 등용되셨다면 누구만 못해서 재상이 되지 못하셨을까? 불행하게 운수가 기구하여 시골에서 병으로 칩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으셨다. 죽어서의 영광은 모두 생전에 쌓은 덕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생전에 수직(壽職)으로서 이미 2품이 되었으나, 돌아가신 뒤에는 1품에 추증되는 영광을 받았다. 세 왕조에서 내리신 증직(贈職)은 황천에서도 밝게 빛나리니, 문충공이 말한 ‘후세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여기에서 실증할 수 있는 것이다. 임금의 은총이 이미 지극하셨으니 다시 무엇을 기다리겠는가?
두 형은 이미 모두 돌아가시고, 불초만이 혼자 남아서 나이도 90에 이르렀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애통함이 더욱 절실하고, 선군의 행적이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질까 깊이 두려워, 피눈물을 흘리면서 이글을 짓는다. 감히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겨 아들이 어버이를 잘못되게 한다는 경계를 범하지 않을까 두렵다. 장차 당대에서 문장을 잘 짓는 군자에게 부탁하여 영원히 전해질 글을 구하려고 하였다. 다만 사적을 서술하는 데는 반드시 가장(家狀)에 의거하는 것이니, 그의 자손이 스스로 평소에 보고들은 것을 기록해서 묘지문(墓誌文)을 짓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만약 “아들이 아버지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지나치게 찬미하지 않을까?”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 자식이 얼마나 순수한 마음으로 엄격하게 기술하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내가 비록 불초하나 어찌 감히 나의 부친의 묘지문에 그 정성을 다하지 않겠는가? 옛날 구양수로부터 우리나라 퇴계(退溪)에 이르기까지 여러 현인들이 부친의 묘지문을 많이 지었으니, 구구한 이 마음을 내세에서 혹시나 헤아려 주실까.
아아! 애통합니다.
#540면
증좌찬성공휘세해유허비(贈左贊成公諱世楷遺墟碑)
사람이 태어나면 집이 있고 죽으면 무덤이 있다. 무덤은 육체와 혼백이 편안히 쉬는 곳이니, 자손은 대대로 보살피는 것이 마땅하다. 집은 평소에 기거하고 노래하며 곡을 하고 모임을 갖는 곳이다. 그러므로 조상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고, 살아 계시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효자와 사랑스런 손(孫)이 선친을 잊지 않고 살던 거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에 사모함이 북받쳐 마음이 울적하고 슬퍼서 혹시라도 뵌 듯하면 대대로 그것을 지켜 훼손하지 않으려는 것은 육체와 혼백이 편안하게 쉬고 있는 무덤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무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던 거처는 가볍게 여긴다. 그래서 무덤에는 묘지(墓誌)를 지어 묻고 묘표(墓表)를 만들어 세워 수천 년이 흘러 골짜기가 변천된 뒤라도 여전히 표지(標識)는 남아 있게 된다. 그러나 평소 살던 거처를 대대로 수호하지 못하여 무너졌는데도 수리하지 않는다. 결국은 사라져 버린 채 후세에 전해지지 않으면 몇 세대가 지난 뒤에는 선조가 살던 옛집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알지 못하니, 이것은 돌아가신 조상을 섬기는 도리가 아니다.
찬성공(贊成公)에 추증된 10대 족조(族祖)는 나주(羅州)의 회진(會津)에 집을 지어 거주하셨다. 그 땅은 봉현(蜂峴)과 독치(纛峙)가 하룻길에 불과하여 선영(先塋)의 시제(時祭)를 제때에 지낼 수 있었고, 또한 장인 임동리공(林東里公)이 사는 곳과 가까워 왕래하면서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공은 남곽공(南郭公)의 손자이고 상촌(象村) 신공(申公)의 외손으로서 가문의 음덕(蔭德)을 받고 집안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고관대작에 충분히 오를 수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젊은 나이에 얻은 반위증(反胃症)이 평생의 고치기 어려운 병이 되어 공무를 맡을 수가 없어 산림에 취미를 붙였다.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는 실징(實徵)으로 80여 세까지 장수하여 회혼례(回婚禮)의 경사까지 치렀다. 이것은 세상에서 다시없는 복을 공이 받으신 것이다. 막내아들에게 주어진 큰 은덕으로 성조(聖朝)가 노인을 우대하는 특전을 공이 받으셨다. 그때 육예(六禮)의 옛 의식도 이곳에서 거행되었고 찬성(贊成)의 증직(贈職)도 이곳에서 받았다. 당시 사람들이 흠모하고 경하하였음은 물론이요, 후세의 자손들이 그의 옛 자취를 추모하여 찾는 자는 다시 백년이 지나도 오히려 잊지 못할 것이다.
옛날 살던 집은 계속해서 전해져 몇 세대에 이르도록 수리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여러 차례 수리하고 여러번 무너져서 영원히 전할 수 있는 계책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집을 수리하는 비용으로 비석을 만들어 세움으로써 옛터를 표시한다면 비록 기둥이나 서까래ㆍ용마루의 옛 모습을 볼 수 없으나 천년이 지난 뒤에도 오히려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 수 있고 또 선조님이 살았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여러 후손들이 합의하여 모금을 하여 장인(匠人)을 시켜 높은 비석을 세우려고 하였다. 나[풍서(豊緖)〕를 종친이라 하여 사람들이 나에게 그 사적(事蹟)을 기록하라고 한다. 생각건대, 공은 80세의 고령으로 우리 집안을 영광스럽게 빛냈고, 문강공(文康公)의 장방(長房)으로서 문강공의 시호가 내릴 때 제사를 주관하는 예도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지금도 그 유적은 예전처럼 보존되고 있으니, 이 터는 공의 후손만이 잊지 못하는 곳이 아니라 참으로 우리 종족이 영원토록 잊지 못할 곳이다. 어찌 다만 의관만 감추는 무덤에 그칠 뿐이겠는가? 이 때문에 나의 글이 비록 졸렬하지만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이상과 같이 기술한다.
공의 휘는 세해(世楷)이고, 자는 여학(汝學)이다. 사산감역(四山監役)으로 임명을 받고도 부임하지 않았고, 여러 번의 수직(壽職)으로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돌아가신 뒤에는 이상(貳相)으로 증직(贈職)되었으니, 판돈녕(判敦寧)을 지낸 막내아들 태항(泰恒)의 귀현(貴顯)때문이었다. 지금 비석 세우는 것을 주관하여 비문(碑文)을 요청하는 이는 8대손 우양(瑀陽)이다.
숭정(崇禎) 기원 후 6번 째 맞는 병인년(1926) 봄 족손 풍서(豊緖)는 삼가 짓다.
#542면
기오정기(寄傲亭記)
금성(錦城, 지금의 나주)의 서남에 있는 기오정(寄傲亭)은 우리 선조 찬성공(贊成公)이 휴식하시던 곳이다. 공은 그 전에 서울 도동(桃洞)의 남쪽에서 사시다가 인조 11년 계유년(1633)에 나주(羅州) 동리공(東里公) 임선생댁(林先生宅)에 장가들었다. 봉현(蜂峴) 독치(纛峙)의 선영(先塋)과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공은 묘사(墓祀)에 갔을 때 금강(錦江)의 아름다움을 보고 좋아서 드디어 강가에 터를 잡아 회진(會津) 동촌(東村)에 정자를 짓고는 기오정(寄傲亭)’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정자의 좋은 경치는 남두성(南斗星)의 중앙에 자리 잡은 것처럼 五星과 八景이 구비되어 있고, 정자의 북쪽 신걸산(信傑山)은 하늘에 우뚝 솟아 6~7리를 꿈틀거리며 내달려 곧장 금강에 이른다. 금강의 원류는 동쪽의 영산강(榮山江)에서 시작하여 서쪽의 바다와 통한다.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고 상선과 어선이 끊임없이 왕래하니, 회진(會津)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정자 아래의 한 줄기 맑은 강에는 작은 배로 손님을 건너 줄 수 있고, 강 건너편에는 큰 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또한 가야산(伽倻山)이 감싸고서 마주 보고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천리에 빈주(賓主)가 상대한다는 것이다. 멀리 남쪽을 바라보면 또한 월출산(月出山)이 구름 밖으로 펼쳐져 있으니, 이른바 세상에서 소금강(小金剛)이라고 하는 산이다. 정자의 서쪽 대숲은 바로 창계(滄溪) 임동리(林東里) 선생의 옛집으로써 임씨(林氏)의 영모정(永慕亭)이 있는데, 호남 지방에서 유명한 명소이다. 대개 산수가 기이하고 風月은 밝으며, 저녁놀은 천변만화하고 삼라만상이 모두 독특한 경치를 무궁하게 드러내니, 참으로 이곳은 맑고 깨끗한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기오정(寄傲亭)’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때때로 숲속의 소나무, 오동나무, 매화나무, 석류에 마음을 붙여 머뭇거리면서 구경하며 친척과 즐거움을 나누었고, 거문고를 연주하고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곳이 바로 이 정자였으니, 이 정자는 참으로 선비가 은거하는 장소인 것이다.
공은 남곽선생(南郭先生)의 손자이고, 상촌(象村) 신흠(申欽) 선생의 외손자이다. 갓을 쓴 신사(紳士)로서 다만 한번 사산감역(四山監役)으로 임명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니, 담박하고도 숭고하시도다. 남쪽으로 창을 내고 은거하면서 지킨 절개는 진나라의 처사 도잠(陶潛)과 서로 부합된다고 할 것이다.
숙종 계유년(1693) 여름 4월 13일에 혼년(婚年)이 다시 돌아와서 회혼연(回婚宴)을 하였다. 공의 막내아들 판돈녕공(判敦寧公)은 그때 시종신(侍從臣)인 필선(弼善)으로서 동궁(東宮)에 있었는데, 휴가를 얻어 귀성(歸省)하였다. 왕은 팔순의 나이에 회혼연을 치르는 일은 드문 일이라고 치하하면서 특별히 옷과 음식을 내려주시고, 공에게 한 등급을 품계를 올려 축하하였다. 차장손(次長孫) 필정(弼貞)은 성균관(成均館)에 있다가 또한 이날 부모를 뵈우려 고향에 돌아오니 당시의 큰 영광이었다. 종내(宗內)에서는 남계(南溪)ㆍ서계(西溪)ㆍ만휴(晩休)ㆍ경재(警齋) 등 여러 선생이 축하하는 시를 보내왔다. 벗으로는 임창계(林滄溪)ㆍ류약재(柳約齋)ㆍ최명곡(崔明谷)ㆍ이한포재(李寒圃齋)ㆍ권제월당(權霽月堂)과 같은 여러 재상들이 모두 모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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