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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溪박세채 和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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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4-22 09:16 조회4,7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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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南溪박세채 和叔
   작성자 : 춘서 
   
   글자 크기 : 보통/크게/가장크게
작성일 : 2010-04-13 오후 11:19:38   


박세채(朴世采ㆍ1631~1695)는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ㆍ남계(南溪),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김상헌(金尙憲)의 문인이다. 성균관 유생 시절에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주장, 효종의 꾸지람을 받자 과거를 포기하였으며, 주로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 등 서인과 학문적 교유관계를 가졌다. 1659년 1차 예송논쟁(禮訟論爭)이 일어나자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한 서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1674년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파직되었으며,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집의(執義)ㆍ동부승지 등에 등용되었다. 1683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립되자 윤증(尹拯)ㆍ최석정(崔錫鼎)ㆍ남구만(南九萬) 등과 소론의 영수가 되었으며,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자 좌의정에 올랐다. 소론의 힘으로 좌의정이 되었지만 이후에는 노론의 정치ㆍ학문적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와 교유한 인물과 초기의 문인들은 대부분 소론이지만, 죽은 뒤에 김간(金幹)ㆍ김구(金構) 등 문인 대부분이 노론으로 이탈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숙종 후반에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고 윤증도 출사하지 않자 조정에서 산림학자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게 되면서 붕당간의 조정에 힘을 기울여 탕평론을 적극 개진하였다. 그의 탕평론은 선조대에 이이가 주장한 조제보합설(調劑保合說)을 모범으로 한 것으로서 황극탕평설(皇極蕩平說)로 구체화되었으며, 영조ㆍ정조대에 이르러 탕평책을 시행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성리학 이론과 예학에 밝았으며, 신라시대부터 당시대까지 학자들의 학통을 기록한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저술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자의 계보를 파악하였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 문순(文純).박세채 영정(경기도유형문화재 제163호)은 2폭으로, 제1폭은 유학자 복식의 초상화(가로 104㎝×세로 180㎝)이고 제2폭은 관복 차림의 초상화(가로 93㎝×세로 175㎝)이다. 관복 차림의 초상화는 높은 오사모(烏紗帽)를 쓴 정장 관복 차림에 공수(拱手) 자세로 호피(虎皮)를 깐 중국식의 교의에 앉아 있는 정면교의좌상(正面交椅坐像)으로 공신도 형식의 그림이다. 신체는 당당한 체구에 두 발을 팔자형으로 벌린 채 족좌대(足座臺)에 올려 놓았으며, 얼굴의 미세한 주름과 눈썹, 수염 등을 꼼꼼한 필치로 묘사해 매우 사실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녹색포 역시 농담(濃淡)을 달리했으며, 의습선(衣褶線)은 진한 먹선으로 몇 개만 간략하게 표현했다. 가슴에는 쌍학문 흉배(雙鶴文胸背)를 두르고 있어 우찬성(右贊成)이 된 60세 전후 시기의 그림으로 추정된다. 호피(虎皮)가 깔린 의자는 17세기를 전후한 공신도 형식에서 볼 수 없는 특징으로 17세기 중엽 이후 중국적인 요소가 당시 초상화 기법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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