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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아는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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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4-06 15:30 조회4,001회 댓글0건

본문

>    甲申政變으로 行列字을 바꾼 이야기
> 甲申政變의 주모자들은 모두가 대대로 벼슬하던 大族出身들인데 일시에 역적이 나란히 나오게 되니 각기 종친들은 부끄러워하여 그들의 항렬자를 고쳤다
> 김씨가문(金玉均)은 [均]을 [圭]로 고치고
> 박씨가문(朴泳孝)은 [泳]을 [勝]으로 고치고
> 서씨가문(徐光範)은 [光]을 [丙]으로
> 서씨가문(徐載弼)은 [載]을 [廷]으로 고쳤으며
> 홍씨가문(洪英植)은 [植]을 [杓]로 고쳤다
>                                 ( 梅泉野錄 에서 )


좋은 자료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중(市中)에는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 ‘항렬을 바꾸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어 우리 종중의 많은 분들도 그렇게 알고 있고, 종중역사에 밝은 분들도 그렇게 믿고 있은나 족보를 검토한 결과 매천야록의 기록은 전혀 믿을수 없는 이야기 이다.

“김옥군, 홍영식, 박영효(1861~1939), 서광범, 서재필 등을 주축으로 한
개화당의 혁명(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면서
그들은 사대당(事大黨)인 민정권(閔政權)에 의해 역적으로 몰리게 된다
]
그래서
김옥균(안동김씨)의 균자 항렬자는 규(圭)로
홍영식(남양홍씨)의 植자 항렬은 杓로
박영효(반남박씨)의 영(泳)자 항렬은 승(勝)으로
서광범(달성서씨)의 光자 항렬은 병(丙)으로
서재필(달성서씨)의 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꾸고 말았다”라고 하는데
갑신정변의 주역인 금릉위 박영효가 역적으로 몰렸기에 항렬을 바꾸었다는 것은 추측이고
김씨, 서씨, 홍씨댁에서는 항렬을 바꾸었는지는 몰라도 우리 반남박씨 가문에서는 영자에서 승자로 바꾼일이 없다.

승(勝) 자(字) 항렬은 갑신정변(1884년) 일어나기 90여 년 전인 1792년부터 쓴 족보 기록이 있고.
금양군댁 종손인 만춘씨에게 확인결과 전혀 바꾼 사실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때는 전혀 사실과 다른 이야기이고.
조선조말 우국지사고 유명한 학자인 황현(1855~1910)이라는 분이 쓴 이야기이기에 사실인듯 모두 믿고있으나, 조사결과는 전혀 다르다.



영자 항렬은

1. 영자 항렬은 오창공 후손 중에서도 금양군댁 자손에서 많은 분이 사용했으나 반남박씨중 다른 문중에서는 발견이 안된다.

2. 판관공 후손에서 몇분 영자항렬이 있다고 하는데 왜 사용했는지 이유가 분명치 않다.
    영진이란 분이 사마시합격당시는 영자 항렬을 쓰는데
                         족보에는 승진으로 기록이 되어있음

3-1 그러나 금양군 종손은 승자항렬을 사용했다.
동량(오창공)-미(금양군)-세교-태두-필하-사익-대원-상로-종수-제상-정양-勝文(1824-1843)-원서-찬주-용우-천호-만춘(현 오창공종손)

3-2 경신보에 기록된 영자 와 승자 항렬 269 분중 영자항렬은 쓰신 분은 143분 승자항렬은 쓴 분은
126분이기에 금양위 후손 모두가 영자 항렬을 쓴것이 아니다 거의 반반이 승자항렬과 영자항렬을 혼합해서 썻다고 볼수 있다.

4. 영자 항렬은 泳學(1824-1885)부터 사용
                미-세교-태두-사설-도원-상면-남수-제현-경양-泳學(1824-1885)


5. 승자항렬은 을유보(1825년 발간) 서문중 陽字下行列 講定圖에 의하면 24세 勝자 25세 緖자 항렬이 결정되어 있으며,
    
6. 승자항렬 실제 사용은 족보에 의하면 1800년 이전부터 사용한 기록이 있다
    
    朴勝顯(1792년) 증 중추원의관 8권240(경신보)
    朴勝宇(1818년) 노직 가선 동추 6권382
    朴勝昌(1816년) 관 통정         8권373
    朴勝文(1817년)                 8권847

7. 금양위 후손중에 참봉공댁으로 양자간분은 승자 항렬을 쓰고
    出 勝肇(조):    準陽(세성-태식--사윤--종면-홍수-제정 (1-578)

8. 참봉공댁에서 금양위 댁으로 양자온분은 영자항렬과 용자 항렬을 사용
    한집안에서 4형제중 3형제가 금양위댁의로 양자를 갔는데
    참봉공댁에 남아있는 첫째분만 승자항렬로 남아 있고
    양자간분 세분은 항렬을 바꿈
    영준    세성 1-581
    영건    세성 1-581
    用厚(1848-1903)원릉참봉 ⟵봉양-제형-붕수-종원-사한-필정-태적-세성 1-581

9. 用雨라는 분은 초명이 泳珏이였다가 용자항렬로 바꿈
    泳薰이란분은 사마시, 문과방목에는 영훈으로 기록되고
    1887년 이후에는 용원이란 이름으로 계속 벼슬을 지냄

10. 용자항렬을 쓰시는 분중에는 벼슬한분이 많음

11. 금양위 후손중 경신보 기록에 용자 항렬쓰는 분은 8 분
    용우; 초명 영각
    用悳; 淮陽郡守
    용원; 부제학
    용후; 원릉참봉
    용면 용기 용하 용석
12 위에 예로 보면 영자항렬에서 승자항렬로 바꾼것이 아니라 용자항렬로 바꾼것이 아닌가 의심이간다.



가 이상의 조사는 경신보에 기록된 자료를 분석한 것으로
나 경신보에서는 어디에도 영자항렬이 승자로 바뀐 흔적이 없다.
(승자항렬로 등재하고 초명이 영자항렬로 기록된분이 없으며
상자항렬에서 종자 항렬로 바꾸었을때는 종자항렬로 등재하신 분들에서게 상자 항렬 초명이 다수기록됨)
    
다 오히려 영자항렬에서 용자항렬로 바뀌었을 가능성은 있다
라 벼슬을 하신분중 금릉위 영효와 같은 영자 항렬을 피하기 위해 용자 항렬을 쓴것이 안닌가 의심이 된다
마 경신보 3권1-136 쪽에 영(승)자 항렬 269분중 승자항렬이 126 분이 된다

바 영자항렬은 최근까지 사용함 영운(1972년생)

사 시중에서나 종중의 종원들이 말하는 영자항렬에서 승자항렬로 바꾸었다는 근거는 전혀 찾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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