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수
  • 오늘408
  • 어제1,165
  • 최대1,363
  • 전체 308,607

자유게시판

박규수의 사랑방에 모여 新세계질서를 논한 그들

페이지 정보

no_profile 한가람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3-16 08:18 조회4,079회 댓글0건

본문

"서양을 주인공으로 인정하되 주연 자리는 양보할 수 없다"
하영선 서울대 교수 강의

국제정치학자 하영선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가 지난 3일 시작한 동아시아연구원(원장 이숙종) 연속강좌 ‘역사 속의 젊은 그들’(총 8회, 매주 월·수 오후 6시)이 대학생과 일반인들의 열띤 수강 열기 속에 이어지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조선일보 후원으로 지난 10일과 15일 서울 여의도 유진투자증권 대회의실에서 열린 강좌 주제는 19세기 후반 ‘개화(開化)’를 고민했던 대표적 인물인 박규수와 유길준이었다. 하 교수가 직접 정리한 강좌 요지를 소개한다.

● 박규수의 사랑방

1870년대 중반 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에 있던 박규수의 사랑방은 20대 전후의 '젊은 그들'로 붐볐다. 10년 후 갑신정변의 '4인방'이 되는 김옥균·홍영식·서광범·박영효의 모습도 보였고 20년 후 갑오개혁의 핵심인물인 유길준도 있었다. 고종의 측근으로서 우의정까지 지낸 환재 박규수(朴珪壽·1807~1877)가 멀지 않은 죽음을 앞두고 '젊은 그들'에게 남기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박규수는 혼탁한 세도정치 속에서 40세가 넘어 뒤늦게 정치무대에 섰다. 북학파의 대부 박지원의 손자인 그는 전통적인 천하질서와 전혀 다른 신(新)국제질서를 맞이해서 고민했다. 더 이상 서양세력을 사람이 아닌 금수(禽獸)로 취급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소(小)중화를 자부하는 조선이 서양을 새로운 문명표준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박규수는 돌파구를 아편전쟁 후 같은 고민을 하는 청나라 웨이위안(魏源)의 '해방론(海防論)'에서 찾았다. 서양 국가와 일본이 수호조약을 맺자고 하면 조약을 맺고 무력으로 공격해 오면 힘의 우위에 따라 방어적으로 싸우면서 서양의 장기들을 배워서 힘을 길러 물리친다는 것이다. 이는 서양세력을 현실적 주인공으로 인정했지만 주연의 자리는 양보하지 않는 논리였다. 그는 이 원칙에 따라 평안감사로서 공격적인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방어적으로 처리했고, 국내정치의 갈등 속에서 난관에 빠진 한일수호조규를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박규수는 초조했다. 신국제질서의 파고는 역사의 지각생인 조선의 예상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방에서 '19세기 386'들에게 박지원의 《연암집》과 청의 '해방론'을 가르쳤다. 그러나 닥쳐오는 파도는 훨씬 빨랐다. 부국강병과 세력균형을 모르는 주인공은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었다. 서양세력을 주연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박규수의 사랑방도 거대한 파도 앞의

난관에 부딪혔다. 박규수가 세상을 떠난 후 '젊은 그들'은 새로운 문명표준을 배우러 해외의 사랑방을 찾아 나서야 했다.

● 유길준의 3중 어려움

구당(矩堂) 유길준(兪吉濬·1856~1914)은 열여덟이던 1873년에 박규수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박규수는 변화하는 세계를 제대로 헤쳐나가려면 서양을 알기 위해 웨이위안(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를 공부하라고 격려했다. 유길준은 과거(科擧)를 포기하고 새 공부를 시작했다. 일본과 미국 유학 3년을 거치면서 유길준은 해방론(海防論)과 만국공법론(萬國公法論)을 넘어서서 서양을 새로운 문명표준으로 받아들여 한국 최초의 근대문명론인 《서유견문》을 집필한다.

서유견문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서양사정》 《학문의 권유》 《문명론지개략(文明論之槪略)》의 3부작 내용을 한꺼번에 다루고 있다. 유길준의 조선문명론은 후쿠자와의 문명론보다 3중으로 어려운 숙제를 풀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전통 천하질서의 변방에 있던 일본과 달리 소중화를 자처했던 조선이 금수로 여기던 서양을 새 문명표준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전통의 강력한 저항으로 일본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었다. 유길준은 조심스럽게 한국형 문명표준을 제시하고 있다, 단순한 국제화도, 자주화도 아니었다. 19세기형 한국적 국제화의 고민이 배어 있었다.

1880년대 한국은 전통적 특수관계의 유지를 강요하는 중국과 근대적 국제관계를 요구하는 일본 및 구미(歐美)열강 사이에서 생존전략을 마련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유길준은 19세기 조선의 복합 외교전략인 '양절체제론'(兩截體制論)을 제시한다. 중국과 전통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일본 및 서양 국가들과도 평등한 근대 국제관계를 확대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복합 그물망 외교의 출발이었다.

유길준은 전통적인 군주제로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험한 파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갑신정변의 실패 후 서양 민주제의 도입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해답을 군민공치(君民共治)에서 찾았다. 민주화의 조심스러운 출발이었다.

그러나 유길준의 3중 복합의 꿈은 전통과 근대의 갈등, 국제 세력균형의 활용 실패, 국내 정치역량의 미흡이라는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했다. 한국은 국망(國亡)의 아픈 역사를 맞이하면서 국흥(國興)의 미래를 새롭게 준비해야 했다.


                 -----------------------------------

본관 반남(潘南). 호 환재(瓛齋)·환재거사(瓛齋居士). 서울 계동 출생.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집안이 가난하여 어려서는 주로 아버지에게서 수학하였다. 15세 무렵 학문적 성장을 거쳐 20세 무렵 효명세자(시호 효명(孝明). 묘호 문호(文祜). 어머니는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이다. 1812년(순조 12)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맞아 가례를 올리고 헌종을 낳았다. 1827년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여, 현재(賢材)를 등용하고 형옥(刑獄)을 신중하게 하는 등 치적에 힘썼으나 대리청정 4년 만에 죽었다. 헌종이 즉위한 뒤에 익종(翼宗)으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이 출범한 뒤에 고종에 의하여 다시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존되었다. 능은 수릉(綬陵)이다.)와 교유하면서 문명을 떨쳤다. 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에 이은 어머니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심하여 20년간 칩거하면서 할아버지인 박지원의 《연암집》을 읽고 실학의 학풍에 눈을 뜬 뒤 윤종의(尹宗儀)·남병철(南秉哲) 등 당대의 학자와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실학적 학문경향을 한층 심화시켰다. 1848년(헌종 14)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으로 벼슬에 나선 뒤 병조정랑 ·용감현령 ·부안현감(1850)·사헌부장령(1851)·동부승지(1854)·곡산부사(1858)를 거쳐, 1860년(철종 11) 약 6개월간 열하부사(熱河副使)로 청국을 다녀왔다. 이때 처음으로 당시 국제정세의 흐름과 제국주의 침략의 실상을 접하였다. 1862년에는 진주민란의 안핵사로 활동, 조선 후기 이래 봉건적 모순의 실상과 그 아래서 신음하는 농민의 처지를 체험하였다.
1864년 고종이 즉위한 뒤 도승지에 이어 사헌부대사헌 ·홍문관제학 ·이조참판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대사간을 두루 거쳤다. 1866년에는 평안도관찰사로 재임 중 그 해 7월 셔먼호사건을 겪었다. 이어 다시 한성판윤을 거쳐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 뒤 대제학 시절인 1872년 진하사의 정사로 다시 중국을 다녀오면서, 서구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여 개혁을 추진하던 청국의 양무운동을 목격하고 조선의 개국과 개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귀국 후 형조판서 ·우의정을 거치면서 당시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치던 흥선대원군에게 천주교의 박해를 반대하고 문호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874년 사퇴,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그의 사랑방에서 젊은 양반자제를 대상으로 실학적 학풍을 전하고 중국에서의 견문과 국제정세를 가르치며 개화파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875년 운요호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해오자 그는 최익현 등의 강력한 척화(斥和) 주장을 물리치고 일본과의 수교를 주장하여 강화도조약을 맺게 하였다. 그의 문호개방 주장은 개항을 위한 내부적 준비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우선 일본의 군사적 침략을 막기 위한 방법의 하나였다. 그 뒤 한직인 수원유수로 있다가 1876년 죽었다. 문집에 《환재집》 《환재수계》가 있고 편저로는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가 있다.


박규수(朴珪壽)
헌종(憲宗)14년(1848년), 증광시(增廣試) 병과25(丙科25)
생년(生年)     1807년, 정묘
자(字)         환경(<환卿) ..
거주지(居住地) 경(京)
부(父)         박종채(朴宗采)
조부(祖父)        박지원(朴趾源)
증조부(曾祖父)    박사유(朴師愈)
외조부(外祖父)    유영(柳詠)
전력(前歷)        유학(幼學)


                     ---------------------------

본관 반남(潘南). 호 환재(&#29915;齋)·환재거사(&#29915;齋居士). 서울 계동 출생.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집안이 가난하여 어려서는 주로 아버지에게서 수학하였다. 15세 무렵 학문적 성장을 거쳐 20세 무렵 효명세자와 교유하면서 문명을 떨쳤다. 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에 이은 어머니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심하여 20년간 칩거하면서 할아버지인 박지원의 《연암집》을 읽고 실학의 학풍에 눈을 뜬 뒤 윤종의(尹宗儀)·남병철(南秉哲) 등 당대의 학자와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실학적 학문경향을 한층 심화시켰다. 1848년(헌종 14)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으로 벼슬에 나선 뒤 병조정랑 ·용감현령 ·부안현감(1850)·사헌부장령(1851)·동부승지(1854)·곡산부사(1858)를 거쳐, 1860년(철종 11) 약 6개월간 열하부사(熱河副使)로 청국을 다녀왔다. 이때 처음으로 당시 국제정세의 흐름과 제국주의 침략의 실상 을 접하였다
1862년에는 진주민란의 안핵사로 활동, 조선 후기 이래 봉건적 모순의 실상과 그 아래서 신음하는 농민의 처지를 체험하였다.
1864년 고종이 즉위한 뒤 도승지에 이어 사헌부대사헌 ·홍문관제학 ·이조참판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대사간을 두루 거쳤다.
1866년에는 평안도관찰사로 재임 중 그 해 7월 제너럴셔먼호사건을 겪었다. 이어 다시 한성판윤을 거쳐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 뒤 대제학 시절인
1872년 진하사의 정사로 다시 중국을 다녀오면서, 서구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여 개혁을 추진하던 청국의 양무개혁을 목격하고 조선의 개국과 개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귀국 후 형조판서 ·우의정을 거치면서 당시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치던 대원군에게 천주교의 박해를 반대하고 문호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874년 사퇴,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그의 사랑방에서 젊은 양반자제를 대상으로 실학적 학풍을 전하고 중국에서의 견문과 국제정세를 가르치며 개화파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875년 운요호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해오자 그는 최익현 등의 강력한 척화(斥和) 주장을 물리치고 일본과의 수교를 주장하여 강화도조약을 맺게 하였다. 그의 문호개방 주장은개항을 위한 내부적 준비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우선 일본의 군사적 침략을 막기 위한 방법의 하나였다. 그 뒤 한직인 수원유수로 있다가
1876년 죽었다. 문집에 《환재집》 《환재수계》가 있고 편저로는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가 있다
이어 사헌부대사헌&#8228;홍문관제학&#8228;이조참판을 차례로 역임하고, 1865년 한성부판윤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곧 이어 지경연사(知經筵事)겸 공조판서에 전임되었는데, 이 무렵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왕실의 위엄을 높이기 위하여 경복궁 중건에 착수하자 그 영건도감(營建都監)의 제조(提調)를 겸하였다. 그뒤 예조판서&#8228;대사간을 거쳐 그해 8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제수되고, 1866년 2월 평안도관찰사로 전임되었는데, 그해 7월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사건(General Sherman)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10월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는데, 천주교도 박해에 대하여 민중이 천주교를 좇는 것은 결국 위정당국이 이들을 교화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므로 처벌보다선도하여야 한다고 주장, 그의 관내에서는 단 한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게 한 일 등의 선정으로 1869년 4월까지 만 3년 2개월 동안 평안도관찰사 직에 잉임(仍任)되었다 1869년 4월 한성판윤에 임명되었고, 이어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뒤 대제학에 재임중 1872년 진하사(進賀使)의 정사(正使)로서 서장관 강문형(姜文馨), 수역(首譯) 오경석(吳慶錫)을 대동, 두번째 중국에 다녀왔다. 이 제2차 중국사행을 통하여 그는 서양의 충격에 대응하는 청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목격, 개국(開國)&#8228;개화(開化)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귀국 후 1873년 5월 다시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그해 12월 우의정에 승진되었다


1. 가계와 수학
가세가 빈한하여 어려서는 주로 아버지에게 수학하였고, 소년시절에는 진외족(陳外族)인 이정리(李正履), 외족인 유지산(柳芝山) 등에게서 훈도받았다
그러나 15세경 이미 조종영(趙鍾永) 등과 망년지교(忘年之交)할 만큼 학문적으로 성장하였고, 20세 무렵 효명세자(孝明世子)와 교유할 때는 이미 문명(文名)이 자심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세자의 急逝와 어머니&#8228;아버지의 연이은 사별로 인한 상심 때문에 근 20년간 칩거(蟄居)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였는데, 자와 호의 &#985168;환(桓)&#985169;이라는 글자를 &#985168;환(환)&#985169;자로 바꾼 동기도 세자의 죽음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동안 이미 할아버지인 박지원의 燕巖集을 통하여 실학적 학풍에 눈을 떴고, 윤종의(尹宗儀)&#8228;남병철(南秉哲)&#8228;김영작(金永爵) 등 당대 일류학자와의 학문적 교유를 통하여 실학적 학문경향을 한층 심화시켰다.

2. 출사와 관직생활
그뒤 1848년(헌종 14)에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간원정언으로서 처음 관직에 나아갔다. 그해 병조정랑으로 옮겼다가 그해 다시 용강현령에 부임하였다.
1850년(철종 1) 부안현감, 이듬해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다.
1854년 동부승지가 되고, 그해 경상좌도 암행어사로서 민정을 시찰하였다.
1858년 다시 곡산부사로서 외직에 보임되었다.
1861년 약 6개월간에 걸쳐 연행사절(燕行使節)의 부사(副使)로서 중국에 다녀왔다.
1856년의 애로호사건(Arrow號事件)에 관련, 영·프랑스 양군이 북경(北京)·톈진(天津)을 점령하자 당시 청나라의 함풍제(咸豊帝)가 러허(熱河)에 피난하였는데, 그 문안사절로 갔을 때 국제정세의 돌아감을 목격할 수 있었고, 심병성(沈秉成) 등 80여명의 중국문인들과의 교유를 통하여 보다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귀국하자 곧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1862년 2월 진주민란의 사태수습을 위한 안핵사(按&#35208;使)에 임명되어 민란의 진상을 조사, 보고하였다. 이는 국내현실을 똑바로 직시할 기회가 되었다. 안핵사로서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 그해 10월 이조참의에 서용되었다.
1864년(고종 1) 고종이 즉위하자 특별 가자(加資)되어 도승지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새로 즉위한 고종으로 하여금 익종(翼宗)의 뒤를 승계하게 한 조대비(趙大妃: 익종의 비)가 지난날 익종과 절친하였던 그를 우대한 때문이다.
이어 사헌부대사헌·홍문관제학·이조참판을 차례로 역임하고, 1865년 한성부판윤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곧 이어 지경연사(知經筵事) 겸 공조판서에 전임되었는데, 이 무렵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왕실의 위엄을 높이기 위하여 경복궁 중건에 착수하자 그 영건도감(營建都監)의 제조(提調)를 겸하였다.
그뒤 예조판서·대사간을 거쳐 그해 8월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제수되고, 1866년 2월 평안도관찰사로 전임되었는데, 그해 7월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사건(General Sherman號事件)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10월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는데, 천주교도 박해에 대하여 민중이 천주교를 좇는 것은 결국 위정당국이 이들을 교화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므로 처벌보다 선도하여야 한다고 주장, 그의 관내에서는 단 한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게 한 일 등의 선정으로 1869년 4월까지 만 3년 2개월 동안 평안도관찰사 직에 잉임(仍任)되었다.
1869년 4월 한성판윤에 임명되었고, 이어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뒤 대제학에 재임중 1872년 진하사(進賀使)의 정사(正使)로서 서장관 강문형(姜文馨), 수역(首譯) 오경석(吳慶錫)을 대동, 두번째 중국에 다녀왔다. 이 제2차 중국사행을 통하여 그는 서양의 충격에 대응하는 청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목격, 개국(開國)·개화(開化)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귀국 후 1873년 5월 다시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그해 12월 우의정에 승진되었다.

3. 치사와 후세교육
이 무렵 흥선대원군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역설하였으나 뜻대로 실현되지 못하자 1874년 9월에 사직하고 1875년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어 국정의 제일선에서 물러나 한거생활에 들어갔다.
이 시기에 그의 사랑방에 출입하는 젊은 양반자제들에게 《연암집》을 강의하기도 하고 중국에 내왕한 사신이나 역관들이 전하는 새로운 사상을 말하기도 하여 개화운동의 선구적 인물들이 그 속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뒤로도 계속 문호개방을 위하여 진력하던 중, 1875년 9월 일본이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일으켜 수교를 강요해오자 오경석 등과 함께 정부당로자들을 설득, 1876년 2월 드디어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하였다.
그해 1월 고희(古稀)를 넘겨 기사(耆社)에 든 뒤 한직(閑職)인 수원유수(水原留守)로 있다가 죽었다.

4 개화사상
그의 실학파적 학문경향은 그의 가문이나 그가 교유하였던 관계인물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그의 학풍은 그 문인 김윤식(金允植)이 지적한 바와 같이, “크게는 체국경야(體國經野)의 제(制)로부터 작게는 금석(金石)·고고(考古)·의기(儀器)·잡복(雜服) 등의 일까지 연구, 정확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하지 않는 바가 없고, 규모가 굉대하고 종리(綜理)가 미세 정밀한” 실학파의 학풍이었다.

박지원의 손자로서 인맥적으로도 북학파에 직결되는 그가 사숙한 선배 중에는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정약용(丁若鏞)·서유구(徐有&#27032;) 등이 있다. 그에게 있어서 ‘실학’으로부터 ‘개화’에로의 사상적 전환은 1860년대부터 1870년대에 걸쳐서 대외적 위기에 대응한 그의 활동과 깊게 관련된다.

1861년 열하부사(熱河副使)로서 청나라를 방문, 국제형세를 목격하였고, 1862년 진주민란의 안핵사로서 현지에 파견되었으며, 1866년 평안감사로서 대동강에 불법침입한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의 격침을 직접 지휘하였다.

그로부터 1871년의 신미양요에 이르기까지 양요(洋擾)에 관련되는 청나라에의 자문(咨文) 및 미국측의 힐문(詰問)과 통상요구에 대한 답장을 대부분 기초하였다.

이러한 대외활동을 통하여 경향으로서는 실학적인 것으로부터 점차 개화적인 것으로 기울어졌던 것으로서 그의 개화사상이란, 요컨대 실학사상의 근대지향적 측면을 내재적으로 계승한 위에 외발적 요인이 작용하여 촉발된, 일찍이 북학파 학자들이 주장한 이용후생(利用厚生)바로 그것이었다.

1866년의 셔먼호사건과 그것을 구실로 하여 무력 개국을 시도한 1871년의 신미양요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국에 대하여 “미국은 지구상의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공평하다고 일컬어지고 난리의 배제와 분쟁의 해결을 잘하며, 또 6주(洲)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토를 확장하려는 욕심이 없다고 하니, 저쪽에서는 비록 말이 없더라도 우리는 마땅히 먼저 수교 맺기를 힘써 굳은 맹약을 체결하면 고립되는 우환은 거의 면할 것이다.”고 내용적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유학자들의 세계관과는 비교될 수 없는 진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현직자로서의 그는 주화(主和)는 곧 매국이라고 규정짓는 흥선대원군의 집정하에서 그의 개국론을 공식적으로 거론할 수는 없었다. 셔먼호사건에서처럼 무력에 호소하는 무법행위에 대하여 단호히 이를 격퇴한 것이라든지, 신미양요에 관한 미국에의 자문에서 “저쪽이 호의로써 오면 우리도 호의로써 응하고, 저쪽이 예(禮)로써 오면 나도 예로써 접대할 것이니, 곧 인정이 진실로 그런 것이며 나라의 통례이다.”라고 말한 것 등은 국가시책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공적 입장에서였다.

문인 김윤식에 의하면 자문·답장에 나타나 있는 박규수의 주장은, “이치에 근거하여 자세히 말하고 그 말을 완곡하게 굴려서 국가의 체면을 잃지 않으려는 것뿐이었다. 문호를 닫고 수호를 물리치는 등의 일은 선생의 뜻이 아니었고 부득이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개국에의 확신을 깊이하고 이를 공공연히 주장하게 된 시기는, 대체로 1872년 진하사의 정사로서 두번째 중국을 방문, 양무운동을 상세하게 목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1871년 청나라의 사죄사로서 프랑스여행에서 돌아온 숭후(崇厚)의 형 숭실(崇實)을 만나 서양제국의 사정을 보다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던 때부터라고 생각된다.

1873년 12월, 우의정에 승진하던 무렵 고종의 친정(親政)이 선포되었고, 이에 따라 흥선대원군에 대신하여 민씨일족이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당시 대외관계에 있어 초점이 된 문제가, 일본이 왕정복고를 통고해온 서계문제(書契問題)였다.

즉, 그 서계가 종전의 서계격식과 달라 조선국왕에 대한 일본의 ‘황(皇)’·‘칙(勅)’, 조선국에 대한 ‘대일본(大日本)’ 등으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수리하기를 거부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직함(職銜)을 가서(加書)한 것은 저네들 자신 그 나라의 정령(政令)이 일신되어 그 인군의 우상(優賞)을 입은 것을 과시한 것뿐이다. 소위 관작(官爵)을 승진하였다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인가? 종래의 격식과 다르다고 하여 이를 힐책하며 받지 않는데, 이것이 일개 통역관의 견해라면 괴이할 것이 없겠지만, 하필 조정 스스로가 이를 교계(較計)하려 하는가? 가히 일소에 붙일 일이다.”라고 하면서 서계의 문구에 구애되지 말고, 저들이 나라의 제도를 변경하여 옛날같이 통호(通好)하려는 뜻을 표명하는 한 대국적 견지에서 서계를 받아들일 것을 대원군에게 역설하였다.

1875년 5월 대원군에게 “만약 저들이 포성을 한번 발(發)하기에 이르면 그 이후 비록 서계를 받고자 하여도 이미 때가 늦어 나라를 욕되게 할 것이다.”고 말하였다.

즉, 왜양일편(倭洋一片)인 상황에서 일본과의 수호를 거부하는 것은 조선의 약점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무력행사의 구실을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1875년 6월 13일, 일본이 보내온 서계에 대한 논의를 위하여 열린 시원임대신(時原任大臣)의 어전회의에서 거듭, 저들 일본이 나라의 제도를 변경하여 인호(隣好)를 주장하고 있는데 이를 거부하면 반드시 한을 품게 하고 불화를 낳을 단서가 될 것이므로 심사숙고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던 중 그해 9월 25일 강화도사건이 발생하였다. 강화도사건에 있어서의 조선측의 패배는 그가 우려한 바대로 최악의 사태로 발전되어 1876년 2월의 강화도 담판은 패자 조선에 대한 승자 일본의 무력적 협박하에 진전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따라서 1876년 2월 26일에 조인된 12개 조항의 병자수호조규(丙子修好條規)는 이렇게 하여 체결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5. 평가
그의 개국론은, 그가 “일본이 수호를 운운하면서 병선을 이끌고 온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호의 사신이라 하니 우리가 먼저 선공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의외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바와 같이, 무력충돌도 불사한다는 자주적 개국이었고, 무력적 굴복에 따른 타율적 개국을 회피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사태는 그의 의도와는 반대방향으로 진전되어버렸던 것이다. 문인 김윤식은 박규수의 만년에 대하여, “나라사정이 날로 그릇쳐지매 공은 늘 천장을 쳐다보며 길게 탄식하며 윤기(倫紀)가 끊어져 나라도 장차 따라서 망하리니, 가련한 우리 생민(生民)이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저버려져야 하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걱정과 분함 때문에 병석에 누웠다.”라고 적고 있다.

정약용·서유구·김매순(金邁淳)·조종영·홍석주(洪奭周)·윤정현(尹定鉉)을 선배로서 사숙하였고, 문우로서 남병철·김영작·김상현(金尙鉉)·신응조(申應朝)·윤종의·신석우(申錫愚) 등과 주로 교유하였다. 그리고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김윤식·유길준(兪吉濬) 등은 그 문하에서 배출된 개화운동의 선구적 인물들로서, 박규수는 곧 북학파와 개화파를 결절(結節)시킨 중심인물이다.
고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환재집 환1齋集》《환재수계 환齋繡啓》가 있고, 편저로는 《거가잡복고 居家雜服攷》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