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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역사의 평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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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종원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3-01 15:58 조회3,2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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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자료에 감사합니다.

자료에 나오는 <대한국민의회>에 대한 간략한 설명(퍼온 글):

1917년 5월 러시아의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결성했던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가 삼일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에 대한국민의회로 개칭된 조직이다. 문창범(文昌範)을 의장으로, 김만겸(金萬謙)을 부의장으로 선출하여 해외의 유일한 임시정부임을 자처했다. 대한국민의회는 각계각층의 지도자 70~80명을 의원으로 선출하여 러시아에서의 한인의 민족통일전선을 이루었다. 또한 행정부를 조직하여 대통령에 손병희, 부통령에 박영효,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하기도 했다. (현현거사공이 부통령에 "추대"된 것은 그야말로 "추대"에 그쳤을 뿐, 그가 실제 "독립 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음).

1919년 5월 상해임시정부에서 노령(露領)대표 원세훈(元世勳)이 대한국민의회와 상해 임시정부의 의정원을 병합하여 정부의 위치를 노령에 정할 것을 제의하자, 의정원에서는 양측을 통합하고 정부의 위치를 노령에 둔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에 한성정부와 상해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의 통합이 결정되어, 8월 30일 대한국민의회는 해산을 결의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의 통합작업에 문제가 생겨 대한국민의회 관계자 중 이동휘(李東輝)만 국무총리로 취임했을 뿐 통합정부의 교통총장으로 선출된 문창범은 취임을 거부하고 블라디보스토크으로 돌아왔다. 그로 인해 대한국민의회와 상해 임시정부 사이에는 알력이 생기게 되었으나 이후 다시 활동을 시작하고 비교적 성공적으로 러시아 한인의 정치력을 결집해나갔다.

한국에 근접한 연해주의 니콜스크·우스리스키 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자리잡고 있다가, 1920년 4월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 시와 그 부근 일대의 도시를 공격하고 적군(赤軍) 기관과 한인의 항일기관을 소탕하자 그해 5월 극동공화국 헤이룽강주[黑龍江州]의 블라고베시첸스크로 이전했다. 그 뒤 간부들은 적군파(좌파 단체)에 가담했으며 이후 코민테른(국제 공산당 조직)의 지도를 받는 한인동맹이 러시아 한인을 대표하게 되었다.

<대한국민의회>는 어디까지나 연해주의 독립단체가 단독으로 결의하여 수립한 것이어서 큰 영향력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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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에 대한 모든 역사적 평가가 그러하듯, 현현거사공(휘 영효)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긍정적인 측면(개화, 개혁 성향)과 부정적인 측면(친일 성향)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행적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인 측면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현현거사공에 대해 "자랑스러운", "빛나는" 등의 수식어를 남용하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상의 업적을 찾아내어 세상에 알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후손들이 조상에 대해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정확한 근거 자료에 의해 조상의 업적을 찾고 그것을 널리 알리는 것은 후손들의 몫이지만,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가급적이면 역사가들의 몫으로 돌리는 것이 여러가지 면에서 유리(?!)하다고 판단된다.

조상을 자랑하면 "팔불출"을 면치 못할 것이고,
조상을 욕하면 "불효"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상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벗어나
좀더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려는 태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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