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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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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2-24 08:06 조회4,494회 댓글0건

본문

봉현(蜂峴) 이야기    
                 종보 19호 2005.10.20 丁緖(대종중 부도유사)

봉현(蜂峴)!
이는 우리 반남 박씨의 상징(象徵)이다.
우리 도선산(都先山)은 나주군 반남면 흥덕리에 모시어 저 있다.
그런데 이 묘 자리를 선정하여 준 지관은 천기누설(天機漏泄, 하늘의 기밀을 발설)이란 ‘벌(罰)’로 묘 자리 작업에서 나온 벌이 지관을 쏘아 고개 마루를 넘지 못하고 죽은 연유에서 “벌 명당”이라고 알려져 있고, 또 이 고개를 벌 고개(蜂峴)라고 한다.


이후 후손이 벌 때처럼 일어나 그 자손이 번성하고 고관대작이 많이 나오니 이를 국내 8대 명당이라 하고 속칭 “벌 명당”이라고들 말하게 된다.
벌 고개의 기록은 1980년에 발간, 경신보 세적 10권 10면, 선조 호장공사적先祖戶長公事蹟에 “암석에 봉현 이란 글이 새겨 저 있음” 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어느 분의 글씨, 시기, 또는 누구의 지시로 새겼는지는 기록이 없고 확인하여도 확실한 고증의 문헌을 찾지 못하고 있다.

1984년에 대종중에 鴻緖(현도유사와 동명이인)도유사님과 鳳緖총무유사님으로부터 전화로 반남의 도로확장과 포장으로 “봉현” 이라고 각인된 암석이 없어지게 되어 도로 시공회사와 교섭(交涉)하여 달라는 요청이 왔다.
                                    
이 지시를 받고 즉시 현장에 가서 이 암각(岩刻)을 살펴보니, 속칭 “벌 고개”에서 도로 남측, 약간 도선산에 가까운 곳,도로변에 풍암(風岩)으로(높이1.5m*폭20cm*두께10cm의)봉현(蜂峴)이란 각자(刻字)가 새겨 저 있었다.
그러나 이 각자는 글씨가 작아 10m 내에서나 글씨를 식별할 수 있어 일반 통행인은 유심히 살펴야 만이 문자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의 암각이었다.
이를 탁본하여 도로공사를 하는 사장에게 종중의 재정상태의 애로를 이야기하면서 암석 글씨 보존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대체 입비(立碑)를 선처하여 주었으면 하고 설명 요청하였다.
현장 소장과 타협하여 가부를 통지한다는 답변을 들은 3일 후에 공사현장 소장으로부터 전화가 회사에서 표시 비(標示碑)를 세워 주겠노라고 하여 그 후에 피차 타협을 하여야 할 돌의 크기, 모양, 암석의 강도 선정, 새길 글씨를 준비하여 달라는 절차 등을 긴밀히 협의하여 지금의 “蜂峴” 이란 기념 표시비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입비 시기는 도선산 성역 개수사업(都先山聖域改竪事業, 1986년)보다 1년이 빠른 1985년의 건립이다.



이 글을 쓰게 된 목적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한 가지는 처음 암각(岩刻)을 한 글씨를 쓴 분, 세운 시기와 지시한분의 기록이 나오리라는 점, 이 점 때문에 처음 각자의 글씨를 탁본하여 2배로 확대하여 이 글씨를 사용한 표시 비 이었습니다.


2. 또 한 가지는 당시 I.D.R. 20억 3300만원 차관융자로 1984년 4월에서 1987년 12월까지 영산포 양산-신북간 도로 확장포장공사를 한 남화토건Co. 崔相玉회장님의 선처를, 공식적으로 감사하다는 의사표시를 못한 점을 아쉽게 생각하던 차 이에 감사를 드리고저 합니다.


최상옥 회장님은 지방에 덕망가(攸好德)로 학교육영, 국내유수의 건설회사, 저축은행, 36홀 콜푸장과 300만평의 농장을 경영하는 국내굴지의 기업가로 성장하신 분임을 부언 드립니다.



또 반남에는 반남박씨 시조천(潘南朴氏 始祖阡)이란 비석이 두 곳에 세워져 있다.

                                        
이중 근래 10년 전후에 세워진 비석은 글, 건립한 분의 기록이 새겨 저 있으나 오랜 시일의 반남박씨 시조천(潘南朴氏 始祖阡)이란 반남 지서 앞 입비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수소문한바 박창수(朴昌壽:클릭)(호 蘭石‘난석’, 1817-1897)공께서 손수 쓰시고 입비 하셨다고 하나, 이를 보첩으로 확인한바 기록으로는 없었다.
난석공은 유고 2권을 남기시었는데, 이 기록을 검토하여 사실 확인을 하여 확실한 기록을 후대에 남기는 작업이 있어야 하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2005년10월30일            
                             광주에서 정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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