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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양" 문제: 토론을 위한 한 가지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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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종원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1-18 08:13 조회4,2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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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양(罷養)”문제: 토론을 위한 한 가지 제안

족보 편찬과 더불어, 선대(先代)에서 이루어진 입양(入養)(입후 立後)을 해제하는 일, 즉 “파양(罷養)”을 허락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 듯하다. 사실 이것이 대종중에서 허락하고 말고 할 수 있는 문제인지는 다소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원칙도 없이 제각각 마음대로 오고갈 수 있게 하자니 어쩐지 선뜻 내키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날의 입양은 서양 선진국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대개의 경우 인도주의(人道主義)에 입각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과거 조선시대에 있었던 입양은 그런 인도주의적인 의미는 사실상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대(代)를 잇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공식 용어는 “입후(立後)”였다. 즉 ‘후사(後嗣)를 세운다.’는 것이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입후(立後)는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규정된 절차에 따라야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양자(養子)는 원칙적으로 형제의 아들 중에서 들여야 하며 형제 또한 아들이 없으면 4촌, 6촌, 8촌 등의 아들 중에서 들일 수 있었다. 또한 적자(嫡子)는 없으나 서자(庶子)가 있는 경우에는 양자를 들일 수 없고 서자(庶子)로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다만 적장자(嫡長子)의 경우에는 서자가 있더라도 아버지가 같은 동생(2촌)의 아들을 양자로 세우는 것이 허용되었으나 동생에게도 아들이 없으면 서자를 후사로 삼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적장자(嫡長子)의 경우에 한해서 서자 대신 친동생의 아들을 후사로 세울 수 있었으나 4촌 이상 형제의 아들은 후사로 세울 수 없었다. (이 규정은 ‘피[血]는 물[水]보다 진하다.’는 의미를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실제로 당시 사회에서 행해진 입후(立後)는 <경국대전>의 절차를 따르지 않은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원래 양자를 들이려면 양측의 부(모)가 합의하여 관(官)에 그 사실을 보고하고 예조입안(禮曹立案)을 발급받아야 비로소 공식적으로 승인되었지만 실제로는 양측의 합의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서자(庶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 4촌, 6촌, 8촌 등의 아들을 양자로 들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20촌, 30촌이 넘는 형제의 아들을 양자로 들인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러한 경우는 엄격히 말해 위법에 해당되는 경우라고 볼 수 있겠다.

조선시대의 입후제도(양자제도)는 “대를 잇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사회경제적인 위치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시 말해서 관직 생활을 하(였)거나 먹고 살만한 가세(家勢)가 유지되어야 양자를 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그냥 “무후(无后)”가 되어 “대가 끊어지는” 운명(?)을 맞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오늘날에는 ‘대를 잇기 위한’ 입양이 사실상 사라졌으므로 “입후(立後)”니 “무후(无后)”니 하는 것들이 별 의미가 없어졌다).

그런데 조선시대 양자제도의 문제는 거기에 비인도적(非人道的)인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입후(立後)는 양자 가는 당사자의 의사(意思)와는 무관(無關)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입양은 생가와 양가의 “어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종의 “계약”과 같은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후손들 모두가 자신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혈통적으로 이어지지 않은 사람의 후손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러다 보니 양가 쪽 일에 무관심해지는 경우도 많았고 이런 저런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여러 대(代)를 내려가서 때로는 그 후손들이 자신들을 아예 양가 쪽 선조들의 혈손(血孫)이라고 착각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문제는 지금의 상황이다. 원래 족보라는 것이 “혈통(血統)”을 기본으로 하는 기록인데 양자의 경우는 엄격히 말해 혈통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오늘날에 와서 상당수의 입양자 후손들이 자신들의 “피[血]”를 찾기 위해 생가(生家)로 돌아가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입양자 후손들이 생가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 감지된다. 족보의 기록을 비롯하여 몇 가지 자료들을 살펴보면 양자 들어온 사실을 은근히 숨기고자(?!) 하는 듯한 표현이 나오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실제로 입양자 후손들 중에는 양가의 선조를 자신의 친(親)선조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모든 입양자 후손들이 생가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파양(罷養)”이라는 용어와 관련되는 것인데, 이 용어는 어딘지 몰래 법적(法的)이고 형식적(形式的)인 냄새를 짙게 풍긴다. 사실 문중에서 족보를 기록하면서 “파양”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종중의 담당자가 판사처럼 법적 구속력이 있는 판결을 내리는 것도 아닌데 파양이 되느니 안 되느니 하는 것은 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필자는 족보(세보)의 기록이 관련된 경우에는 “파양”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파양”은 대종중에서 허락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불허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 싶다.

<해당 문중의 합의하에 입양자의 후손들이 생가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경우에는 생가계(生家系)로 연결하여 족보에 기록하되 아무개에게 입양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기록해 둔다. 단 입양 당사자는 양가 계보 마지막에 이름만 한 번 더 기록하고 생부(生父)를 밝힌다. 생가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입양자 후손들은 지금까지의 방식에 따른다. 이 경우에도 물론 입양된 사실은 기록한다.>

위와 같이 하면, “파양”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또한 문제 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입양된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게 되니 사실의 기록에도 충실하여 거짓이 없게 된다. 따라서 세보편찬위원회에서도 더 이상 “파양”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생가로 계보 연결된 사람들은 생가 쪽 소종중에서 활동하면 될 것이고, 양가에 그대로 남은 사람들은 양가 쪽 소종중에서 활동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생가로 돌아가려는 입양자 후손들의 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고, 족보의 기본 의의, 즉 혈통(血統)의 개념에도 가까워지며 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의미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토인 “숭조돈족(崇祖敦族)”의 의의에도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가 열린 가슴으로, 그리고 한발자국 물러서서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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