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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박승구 (한의학 개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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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한가람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1-07 15:31 조회7,1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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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개척자 14
봉오 박승구(鳳梧 朴勝九(上) (1920~1979)

‘한의학 육성’ 물불 가리지 않았던 한의계 신사
봉오 박승구 선생은 강원도 춘성군 사북면 지촌리에서 출생, 1931년 천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경성제국대학 식물학교습소를 수료하고, 식물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한약의 우수성을 알게 되어, 한의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42년도에 한약종상 시험에 합격하여,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에서 한약방을 운영하였으며, 북한 의생시험에도 합격한 재사였다고 한다.
1953년 서울한의과대학(현 경희대 한의대)을 1기생으로 졸업하고, 한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하여 한의사면허를 받았다. 1955년에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수춘한의원을 개원하여 국민보건에 이바지하였다.

봉오 박승구 회장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서울시한의사회 운영위원, 성동구한의사회장 재임시에 인사를 나누면서 알게 되었다.

첫 인상은 온후한 성품에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부드럽고 따뜻한 카리스마, 날카로운 카리스마의 성격과 강직 근면하면서 신의 있고 매사에 적극성과 열정을 갖고 있는 탁월한 리더십을 갖춘 폭넓은 한의사임을 알게 되었다.

1960년도 서울특별시한의사회 대의원총회에서 회장에 당선된 이종해 씨와 러닝메이트로 부회장을 맞게 되었다. 한의사회의 공직을 맞게 된 첫걸음이었다.
1963년 김명회 회장 시대에 부회장, 1966년 최규만 회장 시대에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한 임기동안만 한다는 것이 3선의 부회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제7대 서울시한의사회장에 당선

1969년 4월17일 제16회 대의원총회에서 제7대 회장에 당선되었으며, 임기동안 업적을 적어 보면 아래와 같다.

△의료봉사 활성화:서울시한의사회 산하 9개 분회가 있었다. ·종로구회장 권중락 ·중구회장 임학만 ·동대문구회장 윤완중 ·성동구회장 임일규 ·성북구회장 최완상 ·서대문구회장 김창준 ·마포구회장 이찬영 ·용산구회장 이금준 ·영등포회장 장세홍. 각 지역별로 빈민촌·난민촌 주민들에게 의료봉사를 실시하였다. 각 지역 보건소, 의약단체와 함께 의료혜택을 주어 언론방송에 보도되어 한의학의 우수성과 한의사의 위상을 높이 알리는데 크게 공헌했다.

△서울시 한의사회관 마련:1970년 서울시 동대문구 회기동 105-91번지(경희대학교 입구 3거리 부근) 대지 59평, 구건물 20평을 매입하여 셋방살이로 전전하던 것을 면하게 되었다.

△자유중국 대북시중의사회와 자매결연:제9회 자유중국 침구절 행사인 한의학술대회가 1970년 12월 16일~17일 2일간, 대북시 중산당 광북청에서 한국, 일본 등 9개 국가에 학자 800여명이 참가하였으며, 한국 학자로는 박승구 회장, 최진창 학회이사, 이정규 한의사가 학술 발표를 하여 한국의 명예를 높였다. 서울시한의사회와 대북시중의사회 오해봉 이사장이 자매결연을 맺었다.

△제10회 자유중국 침구절 행사 참가:박승구 회장, 채인식 경희대 한의대 교수, 임학만 서울 중구회장, 김창준 한의협 중앙이사가 참석했다.

△서울특별시한의사회 경로회 개최: 1971년 10월9일 서울 종로 한일관 3층홀에서 박승구 회장의 주관으로 박성수 회장(한의협 2대 회장), 전 서울시회장 이종해, 최규만 씨를 비롯한 30여명의 노선배 학자들을 초청하여 위로연을 베풀고 기념품도 증정하였다.

박승구 회장은 개회사에서 “오늘 이 자리는 운영위원들이 마련하였으며 한의과대학 설립, 한의사제도, 한의사회 창립에 주역을 맡았던 노학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자리”라고 말했다.

박성수 회장은 답사에서 경로회를 주최해줘서 감사하며, 인생무상, 장년의 세대가 노경의 세대로 바뀌면서 후배들의 위로를 받게 되니 감개무량하며 회고담을 피력하니 눈물이 난다고 하였다.

임일규 기자    

신문게재일자 2009-04-06
입력시간 2009/04/03 13:03


鳳梧 朴勝九(下) (1920~1979)

“침구사법 반대 등 의권투쟁의 선봉에 서다”


제12대 대한한의사협회장에 당선

1972년 3월10일 제17회 전국대의원총회에서 박승구씨가 제12대 회장에 당선, 부회장에 이형찬·임종국 씨가 선출되었다. 여기서 특기한 것은 대한한의사협회 사상 초대에서 제11대 회장까지는 검정출신이었는데, 제12대부터 한의대 출신이 회장에 선출됨으로써, 중앙회장 진출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제11대 이범성 회장으로부터 제12대 박승구 회장이 바통을 이어 받았다.

△새마을운동 무료진료봉사 실시:1972년 7월 10일부터 29일까지 20일간 대한한의사협회 중앙회 임원진들은 새마을운동돕기 장기 무료진료봉사를 강원도와 합동으로 춘성군(춘천시) 관내에서 실시하였다. 강원도청에서 최종완 도지사, 대한한의사협회 박승구 협회장, 의료봉사단원들이 참석하여 발대식을 가졌다. 봉사단은 9개 반으로 편성되었으며, 1개 반원은 4인으로 구성하였고, 2일간씩 의료봉사를 실시했다. 무더운 날씨에도 농촌주민들에게 한방의료시혜를 베풀어 한의사의 위상을 높이었으며 농촌주민들로부터 좋은 호응을 받았다. 최종완 도지사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의료법개정 국무회의 통과:1973년 2월9일 개정의료법 심의를 통과하였다. 주요 내용을 적어보면 ·한방병원 설치(병상 10개 이상) ·진료과목:한방내과, 한방부인과, 한방소아과, 침구과 ·한의사 공의 등용 ·한의학을 교육하는 한의과대학을 설립 등이다.

△제3차세계침구학술대회 개최:1973년 9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서울조선호텔에서 제3차 세계침구학술대회가 성대하게 개최되어 우리나라 한의학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 25개 국가 대표 450여명과 국내 의료계 학자 600여명, 총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침구학에 대한 72편(국내 55편, 외국 17편)의 논문과 실기 발표가 있었다.

첫날인 25일 열린 각국 대표자회의에서는 대회사상 최초로 대화규약의 제정을 보았으며, 매년 4년마다 열리던 대회를 2년마다 열기로 합의하였고, 차기 75년 대회는 미국에서 개최키로 결정했다.

특히 이날 개회식에서는 박승구 대회장의 대회사와 조영식 총재의 환영사에 이어 김종필 국무총리의 치사를 이정호 보사부장관이 대독했으며, 축사는 대한의학협회 조동수 회장(손춘호 서울시의사회장 대독)과 원광대학교 박길진 총장의 축사가 있었다. 27일 오후 5시 세기적인 대회는 폐막하였다.

△국회 보사분과위원회 대한한의사협회 방문:1974년 2월12일 국회 보사분과위원회 김봉환 위원장, 정희섭 의원, 문태준 의원, 구임회 의원 등이 방문하였다. 박승구 회장은 한의협 운영 현황과 사업기획 전반에 걸쳐 브리핑을 하고 의견을 교환하였다.

김봉환 국회보사분과위원장은 한의학 발전을 위한 협회의 의견을 듣기 위해 공식 방문했다고 말했다. 박승구 회장은 보사부내 한방과 설치, 국·공립대학에 한의과대학 설립, 국·공립 동양의학연구소 설치, 침구사법 제정 반대 등을 건의하였다. 이 자리에는 이형찬, 임종국 부회장, 한요욱 서울시회장, 김동한, 임일규, 조용일, 이공헌, 최진창, 김원중 중앙이사가 참석했다.

이상과 같이 한의학 발전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기었으나 제3차 세계침구학술대회를 앞두고 잡음도 있었지만 박승구 회장의 끈기 있는 활동은 계속되어, 신병을 무릅쓰고 학술대회 준비에 전념한 결과 세계침구학술대회는 전무후무하다는 호평 속에서 대성황으로 종료됨으로써 한국의 한의학을 과시하고 더 나아가서는 국위선양에도 많은 성과를 올렸다.

△박승구 회장 임기 완료:1974년 3월10일 한의협 제19차 전국대의원총회에서 한요욱 서울특별시한의사회장이 제13대 협회장에 당선되었다. 제12대 박승구 회장은 정관에 따라 3월말로 임기를 마감했다.

△대한한의사협회 제12대 박승구 회장 서거:회장 퇴임 후 서울 성북구에 개운한방병원을 개원하고 진료를 시작하였으며 극빈자를 대상으로 무료진료도 실시하였다. 또 학술대회를 준비하면서 영어회화의 중요성을 인식, 회화 공부를 열정을 갖고 공부한 것, 또 동양문화의 발전을 위해 동양학술연구원 이사장으로 취임한 것, 루마니아 침술학술대회에 한국대표단장 박승구씨와 선우기·조영환·노두식 씨가 참가하여 학술 발표, 실기시범을 하여 한국 한의학 세계화에 기여하는 등 남다른 애협심과 한의학 세계화에 앞장서 활동하던 중, 1979년 4월13일 별세하였다.

박 회장 서거, 최초로 협회장 거행

장례는 대한한의사협회장으로 최초로 거행하였다. 당시 이금준 장례위원장(대한한의사협회장)은 조사에서 “세계침구학술대회를 국내에 유치하고 만난을 무릅쓰며 강행하시다가 졸도 와병하시던 일,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성공적으로 대회를 수행하심으로써 한의학을 국내외에 선양하시던 일들은 한의학사에 천추에 아로 새겨질 것입니다. 고인이 한의계 지도자로서 한의학계에 끼친 공적은 길이 한의학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추앙하고 특히 제12대 협회장으로 협회 육성에 이바지하는 동안 물불 가리지 않고 활약해온 생애의 고매한 뜻을 이어받아 나가겠다면서 고인의 명복을 기원한다”고 하였다.

봉오 박승구 선생이 유명을 달리하신지 4월13일로 어언 30주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선생께서는 명실공히 우리나라 한의학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신 위업을 회고하며 봉오 선생을 추모하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다.

仁者必壽라는 말이 있어 백수를 누릴 것으로 믿었는데 지금으로 보면 요절이라고 할 수 있는 59세에 부인 김영순 여사와 가족, 친척 등 많은 지인들을 뒤로 하고 가셨으니,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미여지며 아프다. 지금도 봉오 박승구 회장의 영정과 위패를 별방에 모시고 있다고 박승호(전 서울시 도봉구의회의장) 제씨가 전언한다. 부디 평화와 안식의 명복을 빌며 추모의 마음으로 이글을 쓴다.


鳳梧 朴勝九 선생이 걸어온 길

·1920년 4월7일 강원도 춘성군 사북면 지촌리 출생
·1931년 춘성 천전국민학교 졸업
·1939년 경성제국대학 식물학교습소 수료
·1942년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에서 한약종상(한약업사) 운영
             북한 의생(한의사)시험 합격
·1950년 서울한의과대학 입학
             6.25한국전쟁이 나자 군에 투신, 문관(서기관)제주도 병사구사령부 병무과장
·1953년 전라북도 병사구사령부 동원과장
             서울한의과대학(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전신) 제1회 졸업
·1954년 서울지구 계엄사령부 동원과장
             한의사면허 취득
·1955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수춘한의원 개원
·1960년 서울특별시한의사회 부회장
·1965년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총동문회 제3대 회장
·1969년 재경 강원도민회 춘성군 평의원
             서울특별시한의사회 제7대 회장
             경희대학교 대학원 한의학 석사학위 취득(한방내과 전공)
·1970년 한의사국가시험 출제위원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강사
             한국한의사 棋友회 서울시회장
             서울시한의사회와 자유중국 대북시중의사회와 자매결연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동문회 명예회장
·1971년 민주공화당 중앙위원
·1972년 대한한의사협회 제12대 회장, 대한한의학회 회장
             중화민국國醫節(중화민국에서는 한의사를 國醫師로 부른다)에 한국대표로 참가
             제5대 한의사협보사 발행인 사장
             제3차 세계침구학술대회 집행위원장
·1973년 제3차 세계침구학술대회 대회장
·1974년 제4차 세계침구학술대회 명예대회장 추대
             대한한의사협회 법제전문위원
             서울특별시 성북구 개운한방병원 개원
·1977년 루마니아 세계침구학술대회 한국대표로 참가
·1979년 동양학술연구원 이사장
·2000년 대한한의사협회 명예회장 추대
             보건사회부장관상,
             서울특별시장 공로상(1971년) 수상

·1979년 4월13일 향년 59세에 서거.
                대한한의사협회 사상 최초로 협회장으로 거행


※ 활당공 후손 소-응천-동현-병-세주- 태경-필장-사철-정원-종용-학수-제두-정양-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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