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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반남박씨는 밀양박씨 후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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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12-23 14:40 조회6,417회 댓글0건

본문

韓國傳統呼稱典禮硏究院 李星衡 님께

이성형님께서 좋은글을 올려주심 감사합니다만
내용중에 반남박씨가 밀양박씨 후손으로 한 내용이고
우리종중의 뜻과 다른 사항이 있기에 우선 내용을 지우고
그내용의 잘못됨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반남박씨는 밀양박씨의 후손이 아닙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본 반남박씨는 밀양박씨의 후손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본 반남박씨가 밀양박씨의 후손이란 이야기는
1899년 밀양박씨의 박성민이 신라 박씨선원보를 쓰면서 우리 반남박씨 본관 시조인 휘 박응주를 밀양박씨 42세 지길의 아들로 기록한데서 비롯한것이다.

그러나 우리 반남박씨의 기원인
반남박씨의 시조는 호장공 박응주로서
그의 근거는 시조 호장공의 증손인 공민왕 22년(1373)에 발행된 휘 朴秀의 癸丑戶籍에 의한 것으로 반남박씨의 세계도는 다음과 같다
1세 박응주
2세 박의
3세 박윤무
4세 박수 (1296~1373)     高麗 密直副使
5세 박상충(1332~1375)     判典校寺事 右文舘 直提學
6세 박은 (1370~1422)     朝鮮朝 左議政

우리가 처음 간행한 족보 임오보(1642년)를 간행할때 우리 반박씨는 박혁거세의 자손이지만 계축호적에 휘 박수의 증조부가 되는 호장공 박응주까지는 알수있으나, 선인들은 “其先은 不知”라고 하여 그 윗代는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1899년 밀양박씨의 박성민이 신라박씨원선보와 범박이천년사에 호장공 박응주를 소위 밀성대군의 후손이라고 근거도 없이, 우리로서는 도저히 알길이 없으며 고증할 증거도 없는 일을 밀양박씨 족보에 끼워 놓았다.
1924년 갑자보를 편찬할당시에 부록으로 간행한 반남가사 서문에 이사유를 들어 통박하였다.

밀양박씨의 족보를 보면
37세    언부    
38세    효신    효신    의신
39세    공필    공필    림
40세    육경    육화    언수
41세    대화    윤공    후공
42세    간     상례    지길
43세    세균    春기    응주
44세    文彬    상길    의
위와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밀양박씨의 족보기록에
43세 春은 恭愍王朝與李太祖出入相出功勳
     春은 공민왕때 이성계와 출입상했고 공을 세웠다.

44세 文彬은 與圃隱牧隱爲道義倡明正學致任還鄕國朝大司成不就
     文彬은 정몽주,이색과 도의교를 나누었고 유교의 정학을 이르켜 밝혔으며,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낙향한 후 대사성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위의 내용을 보면 43세인 춘과 44세인 문빈은 여말의 인물로 반남박씨의 5세조인 문정공 박상충과 같은 시대의 인물로 보인다,

이색     1328년생
박상충 1332년생
이성계 1335년생
정몽주 1337년생


밀양박씨의 43세 박춘과 44세의 박문빈이 이성계와 이색, 정몽주과 같은 시대인물이라면 우리의 5세조인 박상충과 같은 시대인물인데
박상충의 고조부인 호장공 박응주를 박춘과 같은 시대의 인물로 족보에 끼워 놓은것은 있을수 없는 일로 박응주는 박춘보다 100여년전 인물을 같은 世로 보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에 잘못된 위와같은 내용을
진주의 춘당공파 찬덕씨의 제의로
판관공파 흥양씨, 군수공파 찬혁씨, 남곽공파 은서씨 등이 밀양으로 전주로 다니면서 밀양박씨측과 협의하여
밀양박씨 측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이사 157명이 만장일치로 토의한 결과
‘귀종회의 시정요청의 건 밀양박씨 대종회 이사회(2004.10.5) 결의에 따라 본종회에서도 앞으로 보첩간행시에 之吉 下에 朴應珠(戶長公)을 등재하지 아니할것을 약속합니다’ 라는 공문을 보내왔고 (사진 1)

후에 간행된 족보에 之吉 下에 朴應珠(戶長公)을 등재하지않은 족보를 간행한것을 확인했다.(사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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