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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이씨 문정공계 진조당파 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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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춘서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11-27 16:10 조회7,2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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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이씨 문정공계 진조당파 유집

진조당선생의유사
선생의 호는 진조당이며 휘는광 자는 명원이며 벽진이씨 문정공휘극송의 8세손이다.
성종16년(을사;1485년) 성주 대가면 유촌리에서 휘지성(과의교위;정5품) 공의 이남중 차남으로 태어낳다.
16세 소년시에 문득 부친이 졸서하여 수학을 못하고 계천에서 고기 를 잡고 놀다가 우연이 군서리에게 모욕을 당하여 분한 마음에 다시 수학을 결심하고보백당금선생 과 호지지당 휘금맹성(휘금종직;점필제문인)문하에서 수학하여 중종8년계유년(1513년,당29세)에 사마시에 등과하였고 또 성균시에도 합격한 성균진사이며 중종14년(1519년당35세)에 기묘사화가 있어 사림명현들이 수난을 당하자 대과시를 포기하고 김수면 적산리에 은거하며 적산서당(임진왜란시문집간찰전부소실)을 짓고 벽에 진조(참된생활과 지조를 지키는 뜻으로)라 편액하여 교학신조로 삼고 후학제자들을 교육하였다.
그때 수학한 문인들은 호칠봉(휘금희참), 호서하(라경문), 호송오(휘여응구), 호사직(휘여심), 호야로당(휘이순), 휘배서 휘윤덕문 등이며 이 제현들의 문록에도 수학사실이 기재되어 있다고 전하고 있다.
또 선생은 회제(이언)선생 과 야계(송희규)선생 양선생과는 계유사마시(1513년회시)에 동방등제했으며 원정(여희림)선생과 야천(박소)선생과도 도의교의 하였다.
선생(진조당)은 특히 대유학자이면서 자연섭리지리 실상판단에 통달하여 그 명성이 대단하여 유림사문들이 산두(큰태산과북두칠성)처럼 우러러봤다.
선생의 유적은 성산지와 유학연원록에도 등재되어있다.
배위는 영가금씨 휘금극인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2명과 딸3명을 두엇는데 윤자 휘충우는 생원과,진사과 양과를 합격한 천재 아들이 었으며 또 큰집장질 휘인박(한강외종형)을 교육하여 사마시 진사과에 합격시켜 한집안에 삼인의 진사가 있다고 경향각지에 알여젓고 특히 성균 학사들간에 화제가 되기도했다 .
이시대의 우리 진조당가(성주이문)는 유림에서도 인정받는 성주의 명문이였으며 부유한 가정으로 알여저있엇다.
부행하게도 윤자 휘충우가 조졸하여 차남 휘충준공이 가문의 대를 이었으며 3녀중 계녀를 함양오씨 휘오건(호덕계)에게 고종제(당시산음현감)휘유공작현감이 중매하여 결혼시켰으며 군 호덕계(휘오건)는 홍문전한을 역임했고 신위는 산음 제일의 사액서원인 서계서원에 봉향하고 있다.
외손자 호사호(휘오장)은 사간원 정언직을 역임했고 신위는 선친옆에 배향되어 있다.
진조당은 명종6년(신해;1551년) 향년67세에 로환으로 서거하셨으며 분묘는 대가면 옥성리(앵미동) 송월산에 있으며 유림에서 선생을 추모하여 묘소 앞에 상석과 묘도비를 만들어 세웠으며 선조25년(1592년) 4월에 일본국이 임진왜란을 일으켜 우리 조선국을 공격해 왔는데 당시 병조판서였던 정곤수(진조당종외손자)외가라는 이유로 왜병들이 와서 진조당(정곤수외종조부)묘도비석과 휘충로(정곤수외숙)공의 비석을 파괴하였느데 그후 진조당선생의 묘도비는 유림과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부원하였으며 비문은 호훈 휘정만양(휘정몽주후손)이찬하였다.
휘충노(정곤수외숙)공의 묘도비는 파괴된(반체비) 그대로 지금까지 성주대가면 옥성리 송월산에 남아있다.
임진왜란 참화로 우리 가문은 멸문의 위기를 당하여 구사일생으로 선생의 증손자 휘장립(호양촌공) 한사람이 살아남아 성주 초전 문덕리(송천)에 후손들이 살고 있다.
옛 연고지 유촌리에서 송천리로 이주한지도 350년세월이 지났으나 선조임의 유산인 그 선산을 보존하고 있으며 엣 적산서당(임진왜란시소실)을 송천리 마을앞에 부원하여 제호를 진조제라 하고 진조당파 가문을 유지해 오고있다.
문헌의 기록을 보면 진조당선생과 야천(휘박소)선생과는 우의가 돈독하여 자주 왕래하였고, 후손들까지 신의와 정의를 잊지않고 깊이 간직하고 있다.
야천선생(반남박씨)댁과 우리 벽진이씨 진조당(세칭이광이진사)선생댁과의 세전실화가 있어 기록해본다.
야천선생이 병환으로 임종을 짐작하고 부인에게 말하기를 "성주 이진사댁에 사람을 보내 나의 임종을 알리고 묘탑를 잡도록 부탁하라고" 하였다.
부인은 즉시 노비를 보내 이 사실을 전하였다.
이 소문을 접한 이진사는 즉시 야천선생댁(합천묘산)을 방문하여 도착하니 야천선생은 이미 운명하셨고 부인이 보고 버선 신은발 그대로 마당까지 뛰어나와 오빠라고 부르며 반갑게 영접하였다.
이진사는 부인과 상의하여 장사는 유월장(6개월후;1년후 장사하는 유교장의법)으로 정일하고 묘탑(묘쓸자리)까지 잡아놓고 "이진사 왈 이 묘탑은 후손중 고관대작이 나고 관료가 이여진다고 예언하였다".
그때 야천선생댁은 가난하여 윤씨라는 인척(관계미상)의 도움으로 가사를유지 해오고있는 행편이였는대 유월장기중에 이윤씨가(촌수미상)에 초상이 낟는대 이진사가 잡아놓은 야천선생의 묘탑을 양보해달라고 요구하였다.
부인의 응답이없자 너들은 이진사에게 다시 부탁하면 되겠지만 나는 부탁도 못하니 양보하라고 더욱 강역히 요청하였다.
불득이 부인은 이진사에게 이 사실을 아뢰니 "이진사는 부인의 딱한 사정은 이해하나 그른 묘탑를 다시 구할수 없다고하며 묘책을 알려주었다.
그 묘책은 윤씨가에 그 묘탑를 일단양보 해주고 장일전야에 산아래잇는 소지에서 묘터까지 포대를 깔고 파놓은 묘탑 관구자리에 물을 갓다붓도록 하라고 부인에게 말하였다.
그리하면 윤씨가 와서 이 관경을 보면 필경 행상을 다른산으로 옮겨 갈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인은 노비녀들에게 이진사가 말한 묘책대로 지시하였다.
그 후 윤씨가에서는 장사준비를 마치고 장사당일 행상을 차려 산에 도착하여 파놓은 묘탑 관구자리를 보니 물이 가득히 차있었다.
이 관경을 보고 윤씨는 이진사도 별수없구만 하며 행상을 돌렸다고 전하고있다.
그후 부인은 유월장기를 끝내고 남편인 야천(휘박소)선생의 분묘를 그 자리에 씃다.
야천선생이 작고한후 가세가 약해지니 노비수를 줄이면서 나이가 많은 늙은 노비녀를 내보냈는데 그중 전일묘탑에 물을 여다부었던 노비녀가 윤씨가에 차저가서 종전의 이진사묘책 사실을 토로하니 윤씨가에서 대노하였고 외면하고 도움도않주고 행패가 점점 심해저서 그곳에 못살행편이 되어 이진사(진조당)가 경서강의차 성균에 가면서 야천선생의 부인과 자제분 오형제를 서울로 되리고가서 성균학사들 에게 인사시키고 학사사부(금서울대교수;당시최고석학들)를 정해 주엇다고하며 이학사사부(당시.시관겸직)들에게 수학하여 자제분오형제 모두가 급제에 올아 가문에 큰대도가 열여 후손들에게 큰영화가 이어젓다고 하니 진조당선생이 서울로 이사 시키는데 고생을 많이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후 진조당(휘광)선생이 서거하신후 야천선생 후손들이 덕계(진조당 군;휘오건;홍문전한역임;)선생과 사호(진조당외손자;휘오장;사간원정언역임)을 통하여 제일에는 꼭 제수품(밤;대추;어물)을 해마다 성주대가면유촌리에 보내왔으며 자제분오형제 모두가급제 했다는 좋은소식을 전해왔다고전한다.
그리고 야천선생의 칠세손 휘박필건이 본도선산부사로 부임한후 성주에 군서리를 보내서 성주이광진사(진조당)댁의 후손이 어디에 살고있는지 수소문 하였는대 성주초전문덕리(송천)에 살고있는 휘이기현(진조당칠세손)을 만나 군서리와 동행하여 선산부사와 상면인사후 옛 선조임의 정의와교분을 회고하였다.
그후부터 자주상봉 하였고 박부사가 진조당제사에 제수품(백미사두,대구일미,생율일승,대추일승)과 간독(편지)을 보내왓는대 그간독이 지금까지 진조당파후손에게 전해오고있다.
또 진조당선생의 신도비를 제작하여 보내왔으나(이품관직자가 않이라는이유로)유림의 반대로 세우지 못했으며 영조조(1728년경)초기에 진조당칠세손 휘이기현과 부사박필건이 합천화암서원(휘박소봉향)향사에 함께 다녀왔다고하며 야천선생의 차자(휘박응순)가 선조국구(반성부원군;의인왕후)가 되었고 휘박세당(호서계)이 이조판서에 올앗다고 전해들엇다.
이러한 사실이 있은후 450년이 지난 광무1년(정유;1897년)에 우리 진조당파 후손들의 선산(성주 초전면 칠선동 평지리)에 허위로 투장묘를 써놓고 그 선산의 일부 소유권까지 주장하는 큰산송사건이 생겼는데 이 허위투장묘를 씃던 성주읍 이기봉(당시군서리)과 칠선동평지리동민 배인여(산수호인)와 동민박사홍 등 3인이 모의하여 고의로 일으킨 행패사건이다.
사건의 방조자 배인여 와 박사홍 은 우리 선산에 있는 큰 소나무 일주에 동제 한번 지내고서는 수십년전부터 동제를 지냈다고 허위주장하며 산의 일부 소유권이 동리소유라고 주장하며 군서리 이기봉을 등에 업고 볏집으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산하단에 묻어놓고 분묘(허위투장)를 씃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하기도 했다.
이 불당한 행패에 분노하여 후손 호만회당 휘이문걸공이 경상감영재판소에 삼차나 제소했으나 이속(감영이속과 군이속)들의 농간으로 두번이나 기각당하고 한번은 감영에서 군목사에게 넘겨 패소하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노부휘동엽(휘문걸부친)공이 아들(휘문걸)의 안위를 걱정하여 먼거창(임시우거지)에서 성주군청 앞에 와있는데 군이속들이 합동하여 노부(휘동엽;문걸부친)의 의관을 부수고 구타까지 하여 큰상처를 입어 수개월간 고생하였다.
이러한 행패를 감당할 수도없고 울분을 참을 수도없고 가문의 체면도 있고 또 우리가문에 이 행패를 감당할 위인도 없으니 답답하여 자신(휘이문걸)이 나섰던 것이다.
불득이 서울에 살던 야천선생(휘박소)의 후손 휘박기양(당시이조판서)공과 휘박의양(당시한성부윤)공 형제분을 찾아갔던 것이다.
이 두판서공은 옛 선조들의 정의와 진조당(휘이광진사)선생이 베푼 은혜를 잊지않고 초라한 시골선비 후손(휘이문걸)을 반갑게 만나주셨고, 그동안의 안부와 소관을 물어 행패사실 전모와 재판결과(이속농간등)를 소상히 설명하니 두판서공이 협의하여 성주에 안사(왕명에 의한 사건해결특사)를 파견하여 허위투장묘도 파냈고 주모자 이기봉을 처벌하였으며 방조자 배인여(산수호인)와 박사홍도 처벌하려 했으나 이문걸(만회당) 공이 안사에게 관용을 부탁하여 배인여(전산수호인)를 용서하니 배인여가 송천리집에 찾아와 사의를 표하고 자진하여 여생동안 산수호를 약속했는대 약47년간(1899년-1946년까지)산수호인으로 있다가 세상을 마쳤다.
휘이문걸(호만회당) 공이 서울에 머물면서 여관에서 두판서공과 만나 야천(휘박소)선생 과 진조당(휘이광진사) 선생의 옛 정의를 동경하고 술회한 한시가 있어 소개합니다 !!
백년교의우금진(백년 교의가 오늘에 와서)
여 청소희공신(나그네신세 맑은 밤에 서로 누웠네)
세덕장 점후예(세태는 덕이 없으니 후손보기 부끄럽다) .
가성욕추괴전인(가문을 추락하면 선조에 대하여 죄송하리라)
논회부각청등진(포부를 말하라면 이밤이 다 갈것이고)
화구환망백수신(과거;과거;를 엮을려면 백수;백수;가 이 아닌가)
안득종금빈대탑(이제라도 자리에 자주 마주 앉아서)
고가시예각상진(고풍의 시와 예를 서로 나누리라)!!
두판서공과 만회당공이 마주앉아 야천선생과 진조당선생과의 옛교분을 상기하며 밤을 세웠으며 낮에는 두판서공과 남산공원에 올아 산책도하고 사가에 가서 과분한 대접을 받엇다고 전하였다.
만회당문걸은 두판서로부터 과거응시 권유를 받기도했으나 부행하게도 귀향2년후 40세(경자;1900년)를 일기로 서거하여 과시에 응시도 못했으니 참 안타가울 뿐이다.
진조당은 야천선생의 묘탑(묘쓸자리)을 잡은이후 수많은 친구유현들로 부터 묘탑청원 의뢰를 받었으나 결코 거절(학자가 하는일이 않이라느이유로)하고 응해주지않었으며 심지어 자기(진조당)신후지로 잡아둔 묘탑까지 친구(호여원정)에게 속아서(사기) 뺏기고 불득기 다른산으로 옮겨 묘탑을 잡기도했다.
타인가의 묘탑으로는 야천선생의 묘탑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
옛 속담에 수양산 그늘이 강동팔십리 에 뻣친다는 말과 같이 우리 양문도 사백칠십년전 선조들의 음덕을 후손들까지 정의와 신의를 잊지않고 도우니 이보다 더큰 미덕이 또 있을까요.
야천선생 후손들은 서울에서 십여대를 살면서 진조당선생의 예언과 같이 많은 고관들이 낟스며, 정조대왕이 세자를 얻기 위해서 후비로 수비박씨(휘박준원딸;야천8세손여)와 정식국혼하여 세자순조대왕을출산하여 왕통을이었다.
정조실록을 보면 수비박씨(순조생모)생일 과 순조생일이 동일이라 괴이한 일이라고 기록 하고있다 진조당과 야천선생 간에는 남다른 돈독한 교의관계 임을 짐작 할수있다.
보통의 동문교우관계 였다면 야천선생의 부인과 자제분 오형제를 서울까지 이사시켜 성균  학사들을 사부로 청탁 해주지도 않었을 것이다.
또한 자제분 오형제가 당시 우리나라 최고석학자 사부를 뫼시게된 진조당선생의 음덕을 잘 알기때문에 보답으로 진조당선생 제사에 제수품을 보낸것으로 생각된다.
이연유로 후손들간에 정의와 유대가 한말 고종때까지 이어젓던 것이다 이와같이 양문의 사연이 전설야화가 아닌 세전실화이기 때문에 후손들 간에 정의가 굳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또 다른 세전실화인대 우리선조 진조당(휘광;성균진사)선생 과 성산여씨원정선생(휘여희림)과는 호지지당 휘금맹성(점필제문인이며:원정공외사촌형)선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절친한 친구간이다. 여기에서도 묘터(묘탑)에 얽힌 이야기다.
원정선생이 진조당진사 에게 묘탑(묘쓸자리)한자리 를 청원의뢰했으나 진조당은 좋은묘탑이 없다면서 사양하고 응하지않엇다.
그후 진조당이 자신이 묻일 신후지 묘탑(묘쓸자리)을 잡아두엇는대 원정선생이 이사실을 알고 사취하여 자기부친(휘여우창)의 묘를슷던 사실인대 내용인즉 성주 김수면봉두리(세칭외새출)에 잇는 우리 벽진이씨 진조당파종산과 성산여씨종산(구강제잇는산)은 그 시대 두선생의 친한 교분으로 이루어진 종산들이다.
이 벽진이씨종산에는 진조당선생의 선친 휘지성(과의교위;정오품) 공의 분묘를 조성해놓았다.
이후부터 그산부근 전부를 진조당이 점유관리하고 있었다. 진조당은 자신의 신후지 묘탑를 그산에 잡으려고 대가면유촌리(진조당자택)에서 승마하여 수없이 그산을 왕래하였다.
매일 같은길로 그산을 왕부하니 마가 그길에 익숙하여 집에서 마를 타면 자동으로 그산에 가서 정지하던 장소에 자동정지할 정도로 마가 그행동에 익숙해있었다.
진조당은 마가 자동정지하는 그 부근에 자신의 신후지 묘탑(묘쓸자리)를 잡아놓고 좌향까지 정해놓았다.
이 묘탑은 진조당 자신만이 알고있는 비밀의 묘탑이였다.

이 사실을 대략 알고있는 원정선생이 눈치를 채고 이 묘탑를 탐지하여 이용하려고 많이 연구노력하였다.
원정선생이 진조당의 승마를 빌어타고 탐지하면 그 묘탑(묘쓸자리)를 찾아낼수 있다는 묘책을 생각했던 것이다.
원정공은 마를 빌리려고 사람을 보내 진조당에게 내 마가 병이나서 출타할수 없으니 마를 하루만 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진조당은 술책도 모르고 마를 순순이 빌려주었다.
원정공은 마를 빌려타고 속웃음을 치며 마가 가는대로 타고 있었다.
마는 자동으로 봉두리 새출뒷산에 올라가더니 정지하던 장소에 자동정지하였다.
원정공은 땅에 내려보니 진조당이 다니던 흔적이 있어 그 흔적길을 따라가서 묘탑을 찾아내었고 정확히 좌향까지 알수 있었다.
그후 원정선생의 부친(휘여우창)이 작고하셨다는 부고를 받고 진조당선생이 장지에 가서보니 봉두리(외새출) 뒷 선산(진조당선친분묘가 있는산) 옆산에 진조당이 잡아둔 자기신후지 묘탑에 좌향까지 정확히 분묘(원정부친묘)를 조성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진조당선생은 이 묘탑지를 뺏기고 불득이 진조당 자신은 대가면옥성리(앵미동) 뒷산에 신후지를 잡았다고 전하며 그산에 진조당선생의 분묘가 있다.
김수면봉두리(외새출) 뒷산은 지금까지 우 진조당파종산으로보존되고 있다.
이산 밑에는 금천 증산면에서 내려오는 계천이 있는데, 그계천 바닥에는 하류에서 상유를 향하여 올라가는 거북(구)형의 흑암괴 일괴가 있고 상류에서 하류를 향하여 내려가는 거북(구)형의 흑암괴 일괴가 있었다.
이 이괴암이 수중에 매몰되면 진조당 16세후손(기자행열)이후부터 조금씩 인물이 날 것이라고 진조당 선조임이 예언을 했다.
다행이도 1993년경 성주땜이 조성되어 이 이구형 암괴가 수중에 완전매몰 되었으니 우리 후손들은 잘된 일이라 생각한다.
봉두리(샛출) 뒷산은 우리문과 성산여씨문 양문의 후손들이 산소유권이 인정되면서 분할하여 각기문 소유로 되었다.
성산여씨문의 제실 구강제의 명칭도 진조당선생의 예언과 연관하여 구강제(흑구형암괴가 내려온다는 뜻)란 제호를 지었다고 전한다.
또 다른 예언실화가 있는데 원정선생이 이진사(진조당)에게 청원하여 이루어진 실화이다.

금천시 구성면 길얼리가 있는데 이 길얼리도 이광(진조당)이진사가 잡았다고 전하고 있다.
원정선생이 성산여씨 계파 후손들이 살 세거지를 잡아달라고 요청하여 이진사가 이 터를 잡아놓고 주민에게 당부한 예언이 있어 소개한다.
"후일 이 동리에서 큰 관료인물이 많이나고 동민들이 부유하게 잘살수 있다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주민이 꼭 지켜야할 조건이 있다고 하였다.
그 조건은 마을앞에 흐르는 계천바닥 복세모래(세사)가 동리에서 보이면 동리를 떠나야 한다고 예언하였다"
이 마을에 성산여씨계파 후손들이 집성하여 세거지로 잘살고 있었다.
그런데 1930년경부터 마을에서 계천바닥 모래가 뵈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진사가 예언한 사실도 잊어버리고 무관심하게 살고있었다.
그런데 병자년(1936년) 에 대홍수가 나서 앞 계천 제방이 밤중에 무너저서 동민다수가 사망했고 동리가 폐허가 되었다.
그제서야 이진사공의 예언이 맞았다고 야단법석을 했다고 동민들이 전했다.
이마을 여씨들은 이 동리터를 성주이광이진사(벽진이씨휘광호진조당)가 잡은 래력과 예언한 사실도 잘알고 있으며 예언과 사실이 맞았다고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2003년 12월 5일

                    진조당14세손 이 정    화    근지    
                     대구시 중구 남산동 2220-8
                         Tel (053) 252-5085
                                                                                                                                                                     ! ;                                                     진조당 과 야천 두선생의 학맥도

정몽주 (호포은)
길 재 (호야은)
금숙자 (호강호)
금종직 (점필제)
금맹성 (호지지당)     금굉필 (호한훤당)
이광(호진조당) 조광조 (호 정 암)    박 소 (호 야 천)

     진조당 과 야천 두선생에관한실화전래도

                                 이지성(과의교위)
박 소(야천)     1세    이 광(진조당;성균진사) 이 환(장사랑)
자 오형제        2세     오건(덕계) 이충준    이충우         이충로 정사중

(전원급제)                (전한역임) (전사) (양과합격)
                 3세     오장(사호) 이인회 이인개;인제     이인박    정구(한강)
                                 (정언역임) (전사)    (전사;전사)    (진사;전사) (대사헌)
                 4세                이장립(한강문인;임란시일인생존)    
(박세당)         5세                이두원(진사)    
                 6세             이응초 이경초    
박필건(선산백) 7세                        이기현(박필건과화암서원향사동참)    
박기양(판서)     12세         이재걸(초시합격;전구재자,후구걸자입;회시기확정설)

박의양( " )     12세             이문걸(상경;두판서안 사파)        
                 13세             이승진                    
                 14세             이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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