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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 호장공 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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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11-24 11:09 조회4,010회 댓글0건

본문

1 호장공(戶長公) 휘(諱)
박 응(應)자주(珠)자    응할응 구술주
휘(諱) 돌아가신분의 생전의 이름


2 호장공(戶長公) 출생(出生)
1206년(고려 熙宗 1205-1211) 경으로 추정
근거; 4세 이신 밀직공 수(秀)자 할아버지가 작성하신 계축호적(癸丑戶籍)
에 의거해서 추정
밀지공(휘 수) 출생 ; 1296년(계축호적 기록)
밀지공 父(증참의공 휘 윤무) 출생 추정년대 1266년
밀지공 祖(급제공    휘 의) 출생 추정년대 1236년
밀직공 증조부(호장공 휘 응주)출생 추정년대 1206년
※ 1세대 출생을 30년으로 계산


3 출생지
반남
반남은 백제때 반나부리
신라때 반남군
고려때 반남현
조선조 태종 12년 12월 13일 <반성군 박은의 본향을 나주로 정해 주다 》
반성군(潘城君) 박은(朴訔)의 본향(本鄕)을 나주(羅州)로 내려 주었다. 박은은 본래 나주 임내(任內) 반남현(潘南縣) 사람인데, 이제 예(例)에 따라 임내(任內)를 혁파(革罷)하여 나주에 합치었으므로, 이같은 명이 있었으니 박은의 청을 따름이었다. 뒤에 금천군(錦川君)으로 고쳐 봉(封)하였다.

4 호장
향직의 우두머리
고려초 신라때부터 지방에 세력을 펴고 있던 성주나 호족을 그대로 포섭하여 호     장 부호장의 향직을 준 데서 시작 당대등을 호장 장대등을 부호장
조선시대에 중앙집권제가 확립되자 수령밑에 있는 아전으로 격하


5 봉현
봉현 암석에 봉현이란 글자가 새겨저 있음
전설에 의하면 호장공(戶長公)이 돌아가시니 급제공(及第公)이 같은 고을 풍수객을 초청하였다. 그가 한 곳을 가리키며 “여기가 장사 지낼 만하다”하고는 돌아갔는데, 급제공이 가만히 그 뒤를 미행해서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았다. 풍수객이 자기 집에 가서 처를 불러 “내가 오늘 박씨를 위해 좋은 묘터를 잡았으나 그것은 오히려 큰 버드나무 밑만 같지 못하다. 이곳은 매우 좋고 내가 지적한 곳은 그 다음이다”고 하였다. 그의 처가 “박씨가 평소에 당신을 후대했는데 어째서 힘을 다하지 않는가” 하니 풍수객은 “내가 박씨의 은혜를 잊은 것은 아니지만 만약에 버드나무 밑에 쓴다면 내게 해가 돌아올 것이니 그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급제공이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돌아와서 다시 버드나무 아래로 장지를 잡았다. 장사 때가 되어 땅을 파려하는데 풍수객이 왔다가 크게 놀랐다. 그는 말릴 수 없음을 알고 사죄하며 “꼭 이 땅에 장사를 지내려거든 내가 집에 돌아간 뒤에 광지(壙地)를 파야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고 하였다. 풍수객이 떠난 뒤 급제공은 괴이하게 여기며 오히려 믿지 않고 바로 삽을 가지고 땅을 파니 큰 벌이 광중(壙中)에서 나와 그 풍수객을 따라가서 집에 도착하기 전에 머리를 쏘니 산허리에서 죽었다. 오늘날까지 고을 사람들은 그곳을 봉현[蜂峴 ; 벌고개]이라고 한다.

6 석물
원래 표석(表石)이 있었으니 바로
12세손인 동열(東說)이 본주(本州)의 수령(광해3(1611년) 7/30    박동열(朴東說)을 나주 목사로)으로 재임할 때 세운 것으로 오래되어 글자가 모호하게 되었다.
숙종 35년 기축년(1709)에 16세손인 필명(弼明)이 본도(本道)에 안찰사로 왔을 때 다시 새 표석을 세우고 옛비석은 공의 손자 진사공(進士公)의 묘 바깥 계단 서쪽에 묻었다.
그리고 영조 38년 임오년(1763)에 18세손인 도원(道源)이 본도에 안찰사로 왔을 때 다시 상석 망주(望柱)를 갈아 치움
※ 1986년 정서(남곽공후)가 옛비석등 석물을 간방지 근처에 묻고 상석은 상로제옆 2,4세 급제공 밀직공 단 앞 상석으로 옮김

(※ 조선왕조실록 기록; 영조35(1760) 11/8 박도원(朴道源)을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7 석천암
평도공(平度公)에 와서 고려의 옛 풍속을 따라서 분묘에 암자를 두고 승려로 지키게 하여 나무 채벌을 금하며 제사를 돕게 하였다.

또 7世만에 남곽공(南郭公)이 주목(州牧)이 되어서 제전(祭田)을 더 장만해 주었는데, 이를 이어 자손들이 점점 번성해서 더욱 경건하게 받들었다. 무덤을 지키는 호구도 있고 찬을 마련하는 사람도 있으니 이 암자는 의관(儀觀)을 씩씩하게 하고 순찰을 돕는 데 불과할 뿐이었다.

그 후에 남곽공(南郭公)의 손자 찬성공(贊成公)이 회진(會津)에 우거할 때 풍수설을 듣고서 그 암자를 동쪽 기슭 취봉(鷲峯) 아래로 옮기고 그 터를 장지로 삼았다. 자손들이 그 아래에 대대로 살았는데

석천암(石泉庵)은 묘의 왼편 두 번째 산등성이에 있었는데 영조 15년 기미년(1739) 10월에 실화(失火)로 암자 가운데 보관했던
① 호장(戶長)의 인(印)
② 제기
③ 여조(麗朝)로부터 전해오던 제전(祭田) 문서
④ 선조(宣祖)의 교명(敎命)
⑤ 인성왕후[仁聖王后 ; 仁祖妃] 인의왕후[懿仁王后 ; 宣祖妃]가 내시에게 작성하여 발급케 한 문서
⑥ 예조에서 본주를 순영(巡營)한 전후(前後)의 완문(完文)
⑦ 12세손 동열(東說)이 본주 수령으로 있을 때 중수한 뒤의 완문 및 곡포(穀包布)를 할급해 준 문건
⑧ 16세손 필규(弼揆)가 전주판관(全州判官)으로 있을 때 필사한 권소(勸疏)
⑨ 필명(弼明)이 본도에 안찰사로 왔을 때 갈아세운 두 표석 뒤의 제문
⑩ 외후손인 정협(鄭悏)이 본주 수령으로 왔을 때 다시 세운 양묘(兩墓)의 석인(石人) 광명대(光明臺) 뒤의 제문
⑪ 여러 후손들이 참배할 때의 고문(告文) 및 전곡(錢穀)을 할급한 문서 등이 모두 소실된 것이다. 혹자는 호장 관인은 소실된 것이 아니라 나라가 어지러울 때 분실하였다고 한다.[습유(拾遣)]


8상로재
찬성공 후손
학생공(學生公) 사신(師莘)이 이 재실을 세우고
청하공(淸河公) 충수(忠壽)가 이 편액을 써 붙였다













호장공(戶長公)
유사(遺事)
호장공(戶長公)은 애초에 반남현(潘南縣)에 사셨다. 현은 본래 백제의 반나부리현(半奈尖里縣)인데 신라가 반남군(潘南郡)으로 개명하고 고려가 현(縣)으로 고쳤다가 본조에 와서 면(面)으로 고쳐져 나주(羅州)에 속하게 되었다. 공이 반남호장(潘南戶長)이 되었을 때 주현(州縣)의 촌락은 천호(千戶)였고 백호(百戶)의 촌락이면 모두 호장(戶長)을 두어서 관할하게 하였는데, 공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때의 관인(官印)이 석천암(石泉庵)에 보존되었던 것이 영조 경신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의암회원가승(義庵會源家乘)》에서] 고려 성종 2년 임오년(982) 초에 12목(牧)을 두었는데 향리의 직명 가운데 당대(當大)는 호장으로 하고 등대(等大)는 부호장으로 하였다. 또 낭중(郎中)으로 호장동정(戶長同正)을 삼고 원외(員外)로 호장부정(戶長副正)을 삼으니 호장의 직임은 풍속을 바로잡았던 바 오늘날 현읍(縣邑)의 호장과는 류사하지 않은 듯하다.[《한산이씨보(韓山李氏譜)》에서]
호장이란 향직의 우두머리 고려초에 신라말 빼부터 지방에 세력을 펴던 성주나 호족을 그대로 포섭하여 호장, 부호장의 향직을 준데서 시작 성종2년(983년) 당대등를 호장 장대등을 부호장이라고 고침 이들은 지방의 토호적 존재로 상당한 세력이 있었으나.
조선시대 중앙집권제가 확랍되자 수령 밑에 있는 아전으로 격하되었다.


선조호장공사적(先祖戶長公事蹟)
휘(諱) 응주(應珠)의 묘는 나주(羅州)의 옛 반남현(潘南縣) 봉현(蜂峴)(암석에 봉현이란 글자 새겨져 있음) 갑좌(甲坐)의 언덕에 있다. 원래 표석(表石)이 있었으니 바로 12세손인 동열(東說)이 본주(本州)의 수령으로 재임할 때 세운 것으로 오래되어 글자가 모호하게 되었다. 숙종 35년 기축년(1709)에 16세손인 필명(弼明)이 본도(本道)에 안찰사로 왔을 때 다시 새 표석을 세우고 옛비석은 공의 손자 진사공(進士公)의 묘 바깥 계단 서쪽에 묻었다. 그리고 영조 38년 임오년(1763)에 18세손인 도원(道源)이 본도에 안찰사로 왔을 때 다시 상석 망주(望柱)를 갈아 치우고 분암(墳庵)을 두었는데 이름을 석천암(石泉庵)이라 하였다. 옛적 호장공(戶長公)의 도장과 이것을 금호(禁護)하라는 경종(景宗)의 명령서가 이 암자에 보존되었다가 영조 기미년에 화재로 모두 소실되고 신유년에 암자를 중건했는데 예조에서 내린 허가문서가 있다.

1면
묘표(墓表)
〈고려호장공응주지묘(高麗戶長公應珠之墓)〉[전면(前面)] 우리 선조 호장공(戶長公)의 묘는 옛날에 표석(表石)이 있었는데 연대가 오래되자 자획이 마멸되어 거의 알아 볼 수 없었다. 필명(弼明)이 마침 본도의 안찰사로 와서 돌을 캐어 비석을 다시 세우는 일을 도모하였는데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사직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드디어 여러 종인(宗人)에게 부탁하였는데 무안(務安) 군수인 태삼(泰三)이 이 공사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후손 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 상서원정(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舘修撰官藝文舘直提學尙瑞院正) 필명(弼明) 삼가 쓰다.

#11면
호장공복장속전(戶長公卜葬俗傳)
전설에 의하면 호장공(戶長公)이 돌아가시니 급제공(及第公)이 같은 고을 풍수객을 초청하였다. 그가 한 곳을 가리키며 “여기가 장사 지낼 만하다”하고는 돌아갔는데, 급제공이 가만히 그 뒤를 미행해서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았다. 풍수객이 자기 집에 가서 처를 불러 “내가 오늘 박씨를 위해 좋은 묘터를 잡았으나 그것은 오히려 큰 버드나무 밑만 같지 못하다. 이곳은 매우 좋고 내가 지적한 곳은 그 다음이다”고 하였다. 그의 처가 “박씨가 평소에 당신을 후대했는데 어째서 힘을 다하지 않는가” 하니 풍수객은 “내가 박씨의 은혜를 잊은 것은 아니지만 만약에 버드나무 밑에 쓴다면 내게 해가 돌아올 것이니 그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급제공이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돌아와서 다시 버드나무 아래로 장지를 잡았다. 장사 때가 되어 땅을 파려하는데 풍수객이 왔다가 크게 놀랐다. 그는 말릴 수 없음을 알고 사죄하며 “꼭 이 땅에 장사를 지내려거든 내가 집에 돌아간 뒤에 광지(壙地)를 파야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고 하였다. 풍수객이 떠난 뒤 급제공은 괴이하게 여기며 오히려 믿지 않고 바로 삽을 가지고 땅을 파니 큰 벌이 광중(壙中)에서 나와 그 풍수객을 따라가서 집에 도착하기 전에 머리를 쏘니 산허리에서 죽었다. 오늘날까지 고을 사람들은 그곳을 봉현[蜂峴 ; 벌고개]이라고 한다.

#13면
석천암사적(石泉菴事蹟)
석천암(石泉庵)은 묘의 왼편 두 번째 산등성이에 있었는데 영조 15년 기미년(1739) 10월에 실화(失火)로 암자 가운데 보관했던
① 호장(戶長)의 인(印)
② 제기
③ 여조(麗朝)로부터 전해오던 제전(祭田) 문서
④ 선조(宣祖)의 교명(敎命)
⑤ 인성왕후[仁聖王后 ; 仁祖妃] 인의왕후[懿仁王后 ; 宣祖妃]가 내시에게 작성하여 발급케 한 문서
⑥ 예조에서 본주를 순영(巡營)한 전후(前後)의 완문(完文)
⑦ 12세손 동열(東說)이 본주 수령으로 있을 때 중수한 뒤의 완문 및 곡포(穀包布)를 할급해 준 문건
⑧ 16세손 필규(弼揆)가 전주판관(全州判官)으로 있을 때 필사한 권소(勸疏)
⑨ 필명(弼明)이 본도에 안찰사로 왔을 때 갈아세운 두 표석 뒤의 제문
⑩ 외후손인 정협(鄭悏)이 본주 수령으로 왔을 때 다시 세운 양묘(兩墓)의 석인(石人) 광명대(光明臺) 뒤의 제문
⑪ 여러 후손들이 참배할 때의 고문(告文) 및 전곡(錢穀)을 할급한 문서 등이 모두 소실된 것이다. 혹자는 호장 관인은 소실된 것이 아니라 나라가 어지러울 때 분실하였다고 한다.[습유(拾遣)]



#15면
석천암중건예조완문(石泉庵重建禮曹完文)
예조에서 작성하여 발급하였다. 전라도 나주(羅州) 반남(潘南)의 석천암(石泉庵)은 바로 인성(仁聖)․의인(懿仁) 두 왕후의 선세(先世) 산소에 있는 재실이니, 수호하고 제사하는 등의 사항을 모두 이 암자에 위탁하였다. 그러므로 일찍이 선조 조의 침노하지 말라는 교시와 두 왕후께서 안에서 작성하여 발급하신 완문(完文)이 암자 안에 소중히 보관해 왔는데, 지난해 겨울에 암자가 화재를 입어 불행히 소실되었다고 한다. 선조(先朝)의 진념(軫念)하시던 성의(盛意)를 지금 받들어 모시지 않을 수 없고 앞서 본조(本曹)에서 발급한 문서가 있었으나 그것 또한 소실되었으므로 전례에 의해 명령을 내려 알려주노라. 이 암자가 중건된 후에 묘를 지키는 스님들에게는 무릇 잡역에 관계되는 일은 일체 부과하지 말라. 완문을 작성하여 발급하는 이.

#15면

#17면
상로재기(霜露齋記)
상로재(霜露齋)는 우리 박씨의 재실으로서 나주(羅州) 반남(潘南)의 자미봉(紫薇峯) 아래에 있으니 이는 바로 우리 선조의 장지(葬地) 봉현(蜂峴)의 서쪽이다. 선조를 처음 이 곳에 장사지낸 뒤로 손자 참의공(參議公)을 합장하였고 그 뒤에 3세(世)만에 평도공(平度公)에 와서 고려의 옛 풍속을 따라서 분묘에 암자를 두고 승려로 지키게 하여 나무 채벌을 금하며 제사를 돕게 하였다. 또 7世만에 남곽공(南郭公)이 주목(州牧)이 되어서 제전(祭田)을 더 장만해 주었는데, 이를 이어 자손들이 점점 번성해서 더욱 경건하게 받들었다. 무덤을 지키는 호구도 있고 찬을 마련하는 사람도 있으니 이 암자는 의관(儀觀)을 씩씩하게 하고 순찰을 돕는 데 불과할 뿐이었다. 그 후에 남곽공(南郭公)의 손자 찬성공(贊成公)이 회진(會津)에 우거할 때 풍수설을 듣고서 그 암자를 동쪽 기슭 취봉(鷲峯) 아래로 옮기고 그 터를 장지로 삼았다. 자손들이 그 아래에 대대로 살았는데 학생공(學生公) 사신(師莘)이 이 재실을 세우고 청하공(淸河公) 충수(忠壽)가 이 편액을 써 붙였다.
재실의 시초는 비록 스스로 조상을 위하는 일파(一派) 자손의 정성에서 나왔지만 묘가 선영 안에 있고 재실도 분암(墳庵)의 터에 자리 잡았으니 감히 아버지 사당으로만 삼을 수 없었기에 대종(大宗)이 치재(致齋)하는 곳으로 정하여 철따라 드리는 제사는 반드시 여기에서 보살폈다. 파손되면 보수하는 것에서 대종의 도움을 구하는 것도 도리와 사세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산 아래 사는 자는 오직 남곽공 일파뿐이나 종중의 일을 관리하는 데는 서울에 있는 여러 후손이 번갈아 멀리서 주관하였으니 그들은 멀리 살아서 비록 시절에 따라 성묘하며 머물러 있지는 못하였지만 먼 지방에 와서 제물을 갖추었다. 대대로 그런 사람이 있었으니 첨정공(僉正公) 필규(弼揆), 참판공(參判公) 필명(弼明), 동돈공(同敦公) 사옥(師沃), 대헌공(大憲公) 도원(道源) 같은 이가 전후로 서로 이었다. 우리 고조부 금풍(錦豊) 충헌공(忠憲公)이 이 도에 안찰사로 오셨을 때 동족으로서 도내 육군(六郡)의 수령인 이들이 일시에 와서 성묘하고 묘소 주변의 나무를 돌아보고 친목을 강론하며 시로써 기록하였는데, 六符[六郡 守令] 一節[一按察使]의 요목이 있어 지금까지 전해서 외운다. 요사이 수십 년 전부터는 서울에서 한 사람을 정해서 보내와 10월 보름에 제사를 지내는데 원근의 여러 종족이 모두 다 모인다. 제사를 지내고 물러 나와서는 음복의 예를 행하며 여기에 모여서 친목을 돈독히 하여 하나의 근본에서 나온 의리를 밝히고 백세로 길이 이어갈 우의를 다진다. 주(周) 사람들이 제사를 마치면 연회를 베풀었으니 고사(古事)에서 이 일을 상고할 만하고 진(晉)의 장로(張老)가 제실에서 족인(族人)들을 모았다고 하였으니 이 송(頌)을 훌륭한 송이라 할 만하다. 재실은 모두 네 칸인데 영조 24년 무진년(1748)에 지은 것이다. 지금까지 수백 년이 되었으나 아직 사적을 기록한 글이 없으니 찬성공(贊成公)의 후손으로 선산 일을 하는 정서(鼎緖)가 오랜 세월이 지나면 징험할 수 없을까 걱정해서 충헌공의 후손 풍서(豊緖)에게 알려서 이와 같이 그 사적을 대강 쓴 것이다.
급제공휘의사적(及第公諱宜事蹟)
휘(諱) 의(宜)의 묘에 대한 사실은 전하여 오지 않는다. 봉현(蜂峴)에서 10리 되는 공암현(孔岩縣) 마산리(馬山里)에 커다란 옛 무덤 하나가 있는데 박씨의 산소라고 전해져 오긴 하지만 토박이 서가(徐哥)가 그 곁에 묘를 만든 것이 매우 많다. 또 반남리(潘南里) 정가(鄭家)의 대숲 속에 옛무덤이 있는데 또한 어떤 이는 박씨 묘라고 한다. 영조 경진년에 17대 손 도원(道源)이 두 곳을 다시 조사해 보았으나 모두 증거가 없었다. 박문찬(朴文燦)이 《장연족보(張連族譜)》를 만들었는데 그곳에 “공은 송도의 성등동(星燈洞)에 살았는데 묘는 풍덕(豊德)에 있다”고 하였고 또 “관직은 봉익대부(奉翊大夫) 추밀사(樞密使)며 윤씨와 결혼했으니 용기순위사 대호군(龍騎巡衛司大護軍) 윤보(允輔)의 딸이다”고 했으나 다른 족보에는 실려 있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다.[전하는 말에 묘는 반남서원(潘南書院) 북쪽, 음판촌(陰坂村) 뒤에 있다고 하였지만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또 전하는 말에 묘가 마산(馬山)에 있다고 하나 마산이 어느 군인지 애초에 몰랐다. 13세손 세채(世采)가 일찍이 파주(坡州)에 살 때 비로소 고을 경계에 마산이 있다는 말을 듣고 또 박씨 묘가 이곳에 있다는 말도 전해져 왔기에 해를 넘기며 다시 조사하였다. 퇴임한 뒤에 나주(羅州) 봉현(蜂峴)에서 10리 되는 곳에 마산리(馬山里)라는 곳이 있고 이 마을 가운데 바위 하나가 있는데 바위에 구멍이 많기 때문에 공암(孔岩)이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반남선생(潘南先生) 행장을 살펴보면 선생은 공암현(孔岩縣) 마산리(馬山里)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 땅인가. 공암(孔岩)의 아래는 여조(麗朝)의 고총(古塚)이 하나 있는데 전해오는 말에는 박우(朴禹)의 무덤이라 하고 또한 마산리 안에는 마을 하나가 있는데 박가촌(朴哥村)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우(禹)와 의(宜)는 글자의 소리가 와전되기 쉽고 또한 지명과 촌명은 서로 부합하니 이것이 혹시 증거가 될까. 다만 여조(麗朝)의 장지에는 반드시 음양의 표식이 있기 때문에 도원(道源)이 안찰사로 왔을 때 땅을 깊이 파 보았으나 마침내 증거가 없었으니 어찌 의심이 나지 않겠는가. 어떤 이는 어느 때인가 호장공(戶長公)의 묘를 개축할 때 묻힌 묘지(墓誌)를 찾으려고 영역(塋域)을 널리 파보았으나 마침내 소득이 없었다고 하니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닌가.




진사공휘윤무사적(進士公諱允茂事蹟)
휘(諱)는 윤무(允茂)이고 자(字)는 순유(諄誘)이며 진사(進士)로서 양온령 동정(良醞令同正)이다. 본조에서 이조참의로 증직되었으며 배(配)는 화순오씨(和順吳氏)로 전중내급사 동정(殿中內給事同正) 순(順)의 딸이다. 공의 묘는 호장공(戶長公)의 묘 뒤 묘좌(卯坐)의 언덕에 있고 표석이 있었으니 바로 증손인 평도공(平度公) 은(訔)이 세운 것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희미해져서 기축년에 14세손 필명(弼明)이 새로 묘표를 세우고 옛 표석은 바깥 쪽 계단 서쪽에 묻었다. 임오년에는 16세손 도원(道源)이 상석과 망주석을 다시 배열하였다.
※ 1986년 24세손 직장공파 승조(勝祚)가 진사공위 단을 봉설하였다.
호장공위 상석을 옮겨옴

#20면
유사(遺事)
공의 증손인 평도공(平度公)이 좌상이 되자 판서로 증직을 올리려 할 때 이조에서 논의하여 묘표에 쓰게 하였으니 묘표는 아마 평도공이 호남에 안찰사로 있을 때 세운 듯하다. 그때 쓰는 것은 바로 그때의 증직인데 증직을 가한 뒤에 미처 고치지 못했던 것이다. 어떤 이는 공의 아들 밀직공(密直公)으로 인해 은혜를 내려 증직이 되었다고도 하나 밀직공의 계축년 문서를 상고하면 평도공의 시권(試券) 봉함 안에는 모두 이조에서 논의한 증직이 없으니 이것은 평도공으로 인해 증직한 것임이 명백하다. 재상 반열에 있을 때 증직한다면 재상이 된 뒤에 증직하지 않을 리는 없을 듯하나 문헌이 소루해서 고증할 길이 없음이 유감이다.[아암회원가승(莪庵會源家乘)에서]

#20면

#21면
밀직공휘수사적(密直公諱秀事蹟)
휘(諱)는 수(秀)이고 원(元)의 원정(元貞) 2년, 고려 충렬왕 25년 병신년(1296)에 출생하여 관직은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奉翊大夫密直副使上護軍)으로서 퇴직하였다. 배(配)는 화평군부인(化平郡夫人) 광주김씨(光州金氏)로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정(晶)의 딸이고 산원동정(散員同正) 종(宗)의 손녀이며 급제(及第) 남양(南陽) 홍석구(洪錫九)의 외손이다. 계축년 7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묘는 어디 있는지 모른다. 금천(金川) 고우봉(古牛峯)에 옛 무덤이 있는데 사람들은 박씨 산소라고 한다. 숙종 갑자년에 11세손 세채(世采)가 해를 넘기며 다 찾았지만 단서를 잡지 못하였고 영조 갑인년에는 14세손 사수(師洙)가 안찰사가 되어 해서(海西)에 오고 사창(師昌)이 서흥부사(瑞興府使)로 왔을 때 파보았으나 증거가 없었다. 숙종 경인년에 우봉(牛峯) 이씨(李氏)를 통해 공의 묘가 구수산(九水山) 아래에 있고 표석은 논 가운데 묻혀있다는 말을 들었다. 종중인 세 사람을 보내서 한 달 남짓 찾았으나 확증을 잡지 못하였다. 삼남 이녀가 있으니 장남 상충(尙衷)은 우문관 직제학(右文舘直提學)으로서 증영의정 금성부원군(贈領議政 錦城府院君)이고 장녀는 광주(廣州) 안길상[安吉祥 ; 호적에는 '상(祥)'이 '상(常)'으로 되어 있음]에게 시집갔으니 사위는 문과급제자로서 지정선군사(知旌善郡事)이다. 차남 상진(尙眞)은 문과급제자로서 관직은 판서(判書)에 올랐고 삼남 상경(尙褧)은 사온직장(司醞直長)이며 차녀는 서천(瑞川) 유백유(柳伯濡)에게 시집갔으니 그는 문과급제자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이고 좌사간 직제학(左司諫直提學)이며 호(號)는 저정(樗亭)이다.

밀직공계축호적(密直公癸丑戶籍)
전의(典議) 홍무(洪武) 6년, 공민왕 22년 계축년(1347) 12월 일 북부상(北部上) 오관산(五冠山) 삼리(三里) 임자년 호구준(戶口準)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奉翊大夫密直副使上護軍)으로 치사. 박수(朴秀) 나이 78세. 본(本)은 반남(潘南).
아버지는 진사(進士) 양온령 동정(良醞令同正) 윤무(允茂)
조부는 급제(及第) 의(宜)
증조부는 호장(戶長) 응주(應珠)
외조부는 전중내급사 동정(殿中內給事同正) 오순공(吳順公). 본은 화순.(和順)
처는 화평군부인(化平郡夫人) 김씨(金氏). 본은 광주(光州).
장인은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 정(晶).
처 조부는 산원 동정(散員同正) 종(宗).
처 증조부는 대상(大相) 립(立).
처 외조부는 급제(及第) 홍석구(洪錫九) 본은 남양.(南陽)
장남 상충(尙衷)은 나이 42세. 계사년에 을과(乙科) 제이명(第二名)으로 급제. 직책은 봉상대부 전리총랑 지제교 겸 성균직강(奉常大夫 典理摠郎 知製敎 兼 成均直講).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의 딸에게 장가감.
장녀는 반남군부인(潘南郡夫人) 박씨(朴氏). 남편은 중현대부 지정선군사(中顯大夫知旌善郡事) 안길상(安吉常). 본은 광주(廣州), 갑신년에 을과 제이명으로 급제.
차남 상진(尙眞)은 나이 35세. 경자년에 진사, 을사년에 을과 제삼명(第三名)으로 급제. 직책은 통정랑 기거사인 지제교 겸 성균박사(通直郎 起居舍人 知製敎 兼 成均博士)
삼남 상궐[尙蕨 ; 궐(蕨)은 경(褧)으로 개명]. 나이 28세 사온직장.(司醞直長)
차녀는 반남군부인(潘南郡夫人) 박씨(朴氏). 나이 19세 남편은 선덕랑 장흥고사 겸 성균학유(宣德郎 長興庫事 兼 成均學諭) 유백유(柳伯濡). 본은 서천(瑞川). 기유년 을과 제일명(第一名)으로 급제.
살피컨대 종손의 관리인 집에는 평도공(平度公) 부인 주씨(周氏)가 관청에 낸 소장 초본이 있었는데 그 대의는 이렇다. 성 아래 중량포(中良浦)는 바로 남편이 조부를 안장한 곳으로서 남편이 바로 제사를 주관하는 장손이다. 그러므로 이 묘역 골짜기 근처 40결도 공신의 예에 따라 하사 받은 땅으로 농막을 지어 지키는 이를 배치하였다. 남편이 죽은 뒤 동성 사촌 아우인 전현감(前縣監) 여해(汝諧)가 지난 을사년 봄에 그의 어머니를 묘역 끝에 장사지내고 금년 2월에 또 이미 30여 년 전에 장사지냈던 아버지를 모셔다 합장하고서 재실을 남편 묘 왼쪽에 지었다고 운운하였으니 바로 세종 병오년 9월이다(세종8년1426). 이로써 살펴보면 밀직공(密直公) 묘는 애초에 평도공 묘와 같이 중량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연산군 병진년(연산2년 1596)에 이곳을 회릉(懷陵)으로 썼기 때문에 평도공은 광주(廣州)로 이장하고 밀직공도 반드시 같이 옮겼을 것이나 실전되어 지금은 소재지를 알지 못하니 이것이 바로 후손들이 애통해 마지 않는 바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로 말미암아 찾을 수 있다고 하기에 이에 기록한다.
※4세 밀직공묘는 실전된채로 찾을길이 없어서 자손들이 천수의 한이되었는데, 1986년 24세손 직장공파 승조(勝祚)가 밀직공위 단을 봉설하였다. 참의공위 상석을 옮겨옴



<高麗史>.《112 열전 25 / 제신 / 박상충(朴尙衷) 》
§ 박상충(朴尚衷)
박상충(朴尙衷)의 자(字)는 성부(誠夫)요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 사람이니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등제(登第)하고 여러번 옮겨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었다. 무릇 향사(享祀)는 예의사(禮義司)가 다 맡았으나 전일(前日)에는 문부(文簿)가 없었음으로 여러번 착오를 일으켰는데 박상충(朴尙衷)이 고례(古禮)를 참작하여 순서대로 조목(條目)을 지어 손수 써서 사전(祀典)을 삼으니 그 후로는 이 책임을 이은 자가 얻어 의거할 바가 있었다.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전교 령(典校令)을 제수하니 때에 사부(士夫)들이 부모상(父母喪)을 100일만 입고 곧 벗었으나 박상충(朴尙衷)은 3년을 마치려 하매 얻지 못하고 드디어 직(職)에 나아갔다. 그러나 3년까지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
신우(辛禑) 초에 김의(金義)가 조정(朝廷 명나라)의 사신을 죽이고 북원(北元)으로 달아났는데 그 후에 김의(金義)의 수종자가 왔거늘 이인임(李仁任)․안사기(安師琦)가 후하게 대우하는지라 박상충(朴尙衷)이 상소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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