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수
  • 오늘210
  • 어제1,165
  • 최대1,363
  • 전체 308,409

자유게시판

유비박씨와 박명원

페이지 정보

no_profile 한가람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10-09 11:33 조회3,877회 댓글0건

본문


금성위 휘 박명원과 연관된 것이 몇 가지 중요한 종사(宗史)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열하일기를 지은 연암(휘 박지원)과의 관계다. 연암 휘 박지원은 금성위 휘 박명원의 8촌 동생으로 1780년(정조4년) 6월 금성위가 청나라 고종의 70회 생신을 맞아 진하겸사은사 정사(正使) 로 가게 되자 당시 정사, 부사, 서장관은 자기 아들이나 동생 등 한사람을 데리고 갈 수 있었기 때문에 관리가 아닌 연암선생을 데리고 갔으며 연암선생이 여행 과정에서 소설도 쓰고 일기도 쓴 것이 유명한 열하일기이며 그 후 이것이 유명해지자 연암은 과거에 합격하지 않았는데도 벼슬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순조의 어머니인 유빈 박씨를 정조에게 추천, 후궁으로 들여 순조를 낳아 왕손을 이어가게 했던 일이다. 금성위(박명원)는 영조의 딸인 화평옹주(사도세자의 친 누이)의 남편이므로 정조에게 개인적으로는 고모부에 해당하는 관계이다.

정조는 왕비 효의왕후에게서는 아무런 소생이 없었으며 의빈성씨(이산 드라마에서는 정조의 어릴 적 친구로 그림 그리는 화원으로 나오나 실제는 화빈 윤씨 처소에 있던 궁녀라고 한다.) 에게서 1782년(정조6년)아들 문효세자를 얻었으나 5세에 사망하였고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35세가 넘었으나 아들이 없어 궁궐에서나 신하들이나 모두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 때 금성위(박명원)가 정조를 찾아가 후궁 들일 것을 간곡히 권하니 마지못해 정조가 마땅한 사람을 골라보라고 하였는데 금성위는 내심 자기의 집안 되는 사람 딸을 꼽고 있었던 것이다.

퇴궐한 금성위는 친척집을 찾아가 의논하였으나 친척은 자기 딸을 시기와 암투가 끊이지 않는 대궐에 들여보내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거절하므로 아무런 소득 없이 집에 돌아온 금성위는 임금에게는 마땅한 사람이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였는데 거절당했다는 것을 사실대로 임금에게 얘기할 수도 없어 고민하고 있는데
여주에 사는 친척 박생원이 왔다는 하인의 얘기에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사랑으로 모시라고 했다.

사랑에 들어온 친척 금석공(휘 박준원)은 집안 동생으로 나이 40 후반인 전년도에 간신히 사마시에 합격한 사람으로 아쉬운 일이 있으면 금성위(박명원)에게 들러 도움을 청하곤 하던 사람이었다. 금석공(휘 박준원)은 금성위(박명원)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하고 물어보니 금성위는 고민거리를 얘기할 수 도 없어 “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이번에는 어인 일로 올라 오셨나” 하니 박준원이 “ 실은 이번 장마로 인해 그나마 살던 집도 다 무너지고 조금 있던 농토도 수확을 할 것이 없어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왔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니
금성위가
“ 그럼 식구들은 어떻게 하고?. ” 하니
“ 마누라 하고 딸을 남대문 근처 아는 집에 우선 있으라고 하고 저만 왔습니다.”하므로 딸이라는 얘기에 귀가 번쩍 하여
“ 딸이 몇 살이나 되었는가?. ”하니 “창피한 일이지만 열여덟이나 되었지만 집이 가난하여 시집도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므로 금성위는 잘하면 임금과 얘기한 일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을 하곤 하인들을 시켜 가족을 모두 자기네 집으로 모셔 오도록 하였다.

부인과 딸이 당도하자 금석공 휘 박명원은 부인은 안으로 들라하고 딸을 사랑으로 불러 얼굴을 보니 인물이 보통이 아니었고 이런 저런 말을 시켜보니 대답도 조리 있게 잘하고 인품도 괜찮아 안도의 숨을 쉬었다.

며칠 후 기회를 보아 금석공에게 사실을 말하고 딸을 임금의 후궁으로 들이는 것이 어떤지 의견을 물어보니 금석공(박준원)이야 그저 고마울 뿐이므로 승낙을 하였고 금성위(박명원)는 정조를 뵙고 여자 집에서 승낙을 하였다고 아뢰니 정조는 그 집안 사정에 대하여 하문하였다. 금성위는
“ 집안도 어렵고 현달한 사람도 없는 집입니다.” 라고 답변하니 정조는
“ 그런 집이라면 더 잘 되었다.”고 하면서 1787년(정조11년) 2월 서둘러 후궁으로 맞이하였고 처음서부터 후궁 중에 제일 높은 품계인 유빈이라는 직첩을 내렸다. 이래서 야사에서는 < 장마 덕에 후궁이 된 수빈 박씨> 라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유빈은 3년 뒤인 1790년(정조14년) 6월 창경궁 집복헌에서 아들을 낳으니 이가 후일 정조 다음에 임금이 된 순조이며 유빈은 3년 뒤인 1793년(정조17년) 3월 딸을 낳았는데 이가 숙선옹주이다.

정조는 앞에서 얘기한 의빈성씨가 낳은 문효세자와 화빈 윤씨에게서 옹주를 얻었으나 이도 일찍 사망하여 자식은 유빈 박씨가 낳은 1남1녀가 있을 뿐인데 조선시대 후궁으로 아들을 낳아 자기 아들이 왕이 된 것을 본 사람은 수빈 박씨 뿐이라고 한다.

유빈은 1800년 순조가 임금이 되고도 22년이나 더 살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호강을 하였는데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살아있었고 정조의 왕비인 효의왕후 김씨도 살아있었는데 세분이 사이좋게 지내다가 혜경궁은 1815년 돌아가시고 효의왕후는 1821년 돌아가시고 유빈은 1822년 돌아가시었다.

이것이 금성위(박명원)이 좋은 역할을 하는 바람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니 정조로서나 왕실로서는 금성위(박명원)에 대한 고마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고 박준원의 입장에서도 이리 고마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족이지만 금석공(박준원)은 딸이 후궁이 되는 바람에 뒤늦게 벼슬을 시작하여 판서까지 지냈고 그 아들도 판서까지 하였으니 좋은 일을 하면 복 받는다는 것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