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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의 총 부마수와 호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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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종인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10-09 08:20 조회4,369회 댓글0건

본문

반남박씨의 총 부마수와 호당수

     반남박씨의 총 부마수와 호당수
     중랑장 (2006-10-20 오후 11:23:22) Hit : 203 Vote : 2

반남박씨가 전체적으로 낸 부마와 호당, 그리고 청백리는 몇명인가요?


한국명문
중랑장님!
안녕하세요?
부마느 4명 입니다. 선조의 사위 박미, 효종의 사위 박필성, 영조의 사위 박명원, 철종의 사위 박영
효 입니다.

호당, 즉 사가독서자도 4명입니다. 박종갑(형조판서, 문정공), 박태보(반남박씨가 자랑하는 만고
충신, 충신정려, 불천위).,박의(증영의정, 선조 유교7신의 일인인 박동량의 둘째 아들, 문묘배향공
신 박세채 부친), 박응남(6조 참판 역임, 한국 문벌 2위를 다투는 반남박씨 사단의 총사령관 야천
박소의 아들 입니다.    2006-10-21 오전 9:42:00

한국명문
답변을 끝내고 나니 청백리 질문이 하나 더 추가 되었군요. 청백리는 한 명입니다. 김장생의 문인이
며 김형성에게도 수학한 박병입니다. 박병은 공주목사, 임천군수, 청주목사 등을 지냈습니다.안렴사
나 관찰사의 표창을 수도 없이 많이 받은 관리로 청렴하기로 유명하여 왕으로부터도 세 번이나 은전
이 내렸습니다. 반박이 자랑하는 청백리입니다.    2006-10-21 오전 9:51:00


방관자
반남박씨들 중에는 박태보 외에도 문묘배향공신 박세채를 아주 자랑스러워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더군
요.    2006-10-21 오후 2:34:00

중랑장
안녕하세요 한국명문님
반남박씨의 사이트에서는 부마가 5명 호당이6명으로 기제되어있습니다.

금창부위에 오른 박태정은 부마에 속하지 않는지요?

그리고 반남박씨의 사이트에서 기제된 수치와 많이 다른데 왜그런지 이유
를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좋은하루 되세요    2006-10-21 오후 2:49:00

박태정은 소현세자의 사위로 왕의 사위가 아닙니다. 물론, 왕세자의 사위도 정3품의 부마 부위라는 작
명은 주었지만, 엄밀히 따지면, 왕의 사위와 왕세자의 사위는 차원이 틀립니다. 그래서, 정확한 반남 박
씨의 부마 수는 4분이 맞습니다.    2006-10-21 오후 3:00:00

한국명문
.....님!
답변 고맙습니다. 중랑장님! 호당 6명은 잘 모르겠습니다. 저가 파악한 바로는 4명이었습니다. 호당록
의 박씨를 전부 점검해보면 알 수 있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는 문제입니다. 저는 반남박씨 족보를 찾
아 본 것입니다. 원체 페이지가 많아 보는 과정에서 누락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2006-10-21 오후 3:35:00

한국명문
중랑장님!
지금 생각해보니 이 창은 호당이 4명, 반남박씨 사이트는 6명!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창은 야천 박소 가문의 숫자만 따졌고 반남박씨 사이트는 반남박씨 전체
를 따졌을 경우 그런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님께서 반남박씨 사이트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 보
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2006-10-21 오후 9:36:00

중랑장
호당면에서 야천 박소의 가문만 따졌다면 4명이 될수있겠군요.
일단 반남박씨 사이트에서 호당으로 올라와있는 6명 (박승임,박응남,박기,박태
상,박태보,박종갑)등 한국명문님께 죄송하지만 리스트를 검토해 주셧으면 합니
다.

그리고 부마로는 5명으로 기제 되어나와있습니다,

소현세자의 사위인 박태정은 어떻게 되는것이지요?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소현세자를 부마로 쳐줌이 마땅하다는 내용이 기술되어있
는데, 현대에와서는 박태정을 부마로 쳐주지 않는가요?    2006-10-22 오후 12:53:00

왕의 사위와 왕세자의 사위는 엄연히 다릅니다. 왕과 왕세자의 지위를 똑같이 볼 수 없듯이, 왕의 사
위와 왕세자의 사위를 같은 부마라고 해서, 똑같이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마는 원칙적으로 왕의
사위만을 쳐주는 것이 옳습니다. 왕세자는 왕이 아니고,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불안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왕세자의 사위를, 왕의 사위와 동등하게 보는 것은, 왕비와 왕세자빈을 똑같이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호당은 이 창의 문중자료에서, 연안 이씨 덕천님이 올려주신 자료를 보시면,
반남 박씨가 전체적으로 배출한 호당 배출 수는 5분으로 나와 있습니다.    2006-10-22 오후 3:48:00

한국명문
중랑장님!
박태정 건은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리고 호당의 박승임은 좌의정 박은의 아드님에서 박소 가문과 박승임 가문이 갈렸습니다. 박소
가문은 박 병문 후손 집이고 박승임은 박 병균 후손 집입니다. 박승임은 대사간을 지냈으며 문장
과 덕행으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경북 영주에 세거하는 반남박씨의 명문의 한 가문입니다.

그리고 님이 말씀하신 박기는 박의가 맞습니다. 박의는 호당에 들었습니다. 문제는 박태상입니
다. 박태상은 호당록에 올라 있지 않습니다. 현대에 출간된 호당록 마다 박태상이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박태상이 대제학을 지낸 것을 보면 호당 출신이 맞을 것 같습니다. 대제학은 호당에서 사
가독서한 자만이 되기 때문이지요. 호당록마다 다 누락된 다는 것도 이해가 안갑니다만 박태상을
호당 출신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듯 합니다. 그러면 호당 5명이 맞겟습니다.    2006-10-22 오후 4:40:00


호당 출신이 아닌 사람이 대제학이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박태상이 호당록에 빠져 있다면 호당에 들
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연안 이씨 덕천님이 올려주신 자료가 정확하지 않나 싶습
니다. 야천 박소 가문에서는 호당이 4분이 맞고, 전체적인 반남 박씨가 배출한 호당은 5분이 맞는 것 같
습니다. 그런데 박규수는 호당록에 기록되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2006-10-22 오후 5:03:00


한국명문
.....님
님의 말씀이 정말 맞군요. 대제학도 호당 출신이 아닌 경우가 더러 있군요. 박규수도 대제학을 지
냈는데 호당록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박소 가문은 호당이 4명이 맞습니다. 이 창이 통계를 잡을
때도 박태상이 호당록에 없어서 뺐던 것입니다.

중랑장님!
그러면 반남박씨 전체 호당 수는 5명이고 박소 가문은 4명입니다.    2006-10-22 오후 9:05:00

중랑장
한국명문님! 안녕 하십니까

수고 많으십니다,

님의 말에 따르면 박태정은 소현세자의 사위이기때문에 부마로 보지않음이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반남박씨에서는 부마가 4명이 정확합니까?
그런데 왜 반남박씨의 사이트에서는 부마가 5명이죠?

2006-10-25 오후 5:36:00

한국명문
이 창에서 반남박씨 박소 가문의 부마 수는 4명입니다.
반남박씨 사이트에서는 왜 5명이라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2006-10-27 오후 4:54:00


못말려
반남박씨들 진짜 끈질기 집안이다....1명더많고 적고가그리 대단한가?
인정되는 것만 을 올려야.....
반남박씨중에 을사5작박제순도 있습니다..    2006-10-29 오후 4:43:00


호머심슨
을사오적이라면 저희 가문에도 있습니다..하하..

하지만 을사오적을 배출한 가문이라고 해서 그 후손들까지 미워하면 안되겠지
요..

2006-11-10 오후 11:33:00

observer
그렇습니다. 허허허.
한 사람이 나쁘다고 그 사람의 가문 전체를 나쁘다고 보는 것은 아무래도 올바른 태도가 아닌 것 같습
니다. 모든 가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좋은 사람도 있었고 나쁜 사람도 있었습니다.    2006-11-11 오후 1:55:00


반남
호당 청백리와 거리가먼 박제순도 있습니다.

본관 반남, 호 평재(平齋)이다. 1883년(고종 20)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주차천진종사관(駐箚天津從事官)·교리·장령·동부승지·주차천진독리통상사무(督理通商事務)·공조참의·이조참의를 지냈다. 1893년 호조참판으로 있을 때, 동학도(東學徒)가 보은집회를 열자 위안스카이[袁世凱]와 청나라 군사 파병문제를 협의하였다. 이듬해 장흥부사를 거쳐, 전라도관찰사·충청도관찰사·중추원의관·외부협판·외부대신 등을 역임하였다.

1899년 전권대신으로 조·청통상조약(朝淸通商條約)을 체결, 1901년에는 조·비수호통상조약(朝比修好通商條約), 조·백수호통상조약(朝白修好通商條約)을 각각 체결하였다. 1902년 주청전권공사(駐淸全權公使)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가, 1904년 귀국하여 외부대신이 되었다. 1905년 한규설(韓圭卨) 내각의 외부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조인, 을사5적신(賊臣)의 한 사람으로 규탄받았다. 그해 한규설의 뒤를 이어 참정대신, 1907년 중추원고문 등을 지내고, 1909년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내부대신이 되었다.

1910년 8월 국권피탈조약에 서명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유림(儒林)의 태두(奉斗)로 알려졌으며, 서예에도 능하여 특히 해서·행서를 잘 썼다.
2007-07-04 오전 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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