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손수 지어주신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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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⑤] 국회의원 박영선 편박영선·국회의원
기사 100자평(13)
입력 : 2009.08.01 15:00 / 수정 : 2009.08.02 18:37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 어머니가 손수 지어주신 옷
<이 기사는 월간조선 8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수필가 피천득 선생님은 가슴속에 간직한 아스라한 그리움을 이렇게 표현했지요.
요즘 생각해 보면 사랑하는 내 어머니에게 일생을 못 잊으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함에도 그 말 한 번 지금껏 제대로 아니 한 듯합니다.
“얘, 좀 일찍 다녀라….”
어제도 어머니는 제 귀가가 늦다며 걱정하셨습니다.
이제 제 나이 오십. 제 늦은 귀가를 아직도 걱정해 주시는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어머니의 소중한 걱정에 대해 저는 아직도 감사는커녕 마치 짜증 어린 소리로 대꾸했지요.
“어머닌 제발 자식에 대한 안달 좀 내려놓으실 수 없나요?”
하나 곧바로 왜 어머니께 다정하게 대하지 못했는지 또 후회했지만, 어머니는 이미 댁으로 가신 후였습니다.
크림빵이 10원이던 시절이 있었지요. 아이들 얼굴만한 둥근 빵 속에 하얀색 크림이 들어간 삼립 크림빵 말입니다. 그 시절엔 버스 차비도 10원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국민학교, 요즘 표현으로 하면 초등학생이었지요. 어머니는 그 시절 내게 용돈을 한 달에 500원 주셨습니다. 그 500원 속에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차비가 포함돼 있었습니다. 크림빵을 매일 사 먹고 싶었지만 500원으로는 좀 부족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크림빵이 먹고 싶으면 난 아이들과 종종 학교에서 집에까지 걸었던 기억이 아스라합니다.
그런 날이면 어제처럼 어머니는 왜 이렇게 늦었느냐며 호되게 야단을 치셨습니다. 대문 앞에서 저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시느라 지쳐 있던 어머니의 얼굴엔 반가움과 노여움이 교차했지요.
500원으로 한 달 살기
제가 울먹이며 크림빵 사 먹고 싶어 그랬다고 하면 어머니의 호통은 좀 수그러들긴 했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용돈을 늘려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땐 그것이 좀 서운했지요. 그러나 저도 용돈을 늘려 달라고 떼쓰지는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500원으로 한 달 생활하기’를 몸에 익히는 지혜를 알아 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디디면서 그때 저는 ‘어머니의 500원의 교훈’을 깨달았습니다. 풍족한 것보다 부족한 듯 살아가며 그 부족한 것을 만들어 가는 게 삶의 즐거움이며 더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제 아이에게 저는 그렇게 부족하게 살아가며 즐거움을 얻는 법을 아직 가르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요즘 아이들은 너무 풍요롭고 풍족하여 부족함이 주는 삶의 기쁨을 찾는 방법을 모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렸을 때 제가 학교 길을 나서면 제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골목길에서 제 뒷모습을 지켜보시던 어머니를 기억합니다. 골목길을 돌아설 때 혹시나 하고 뒤를 돌아보면 어머니는 늘 저를 보고 계셨고 저도 어머니를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었지요.
매일 아침 그렇게 어머니는 저를 학교에 보내셨지요. 그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의 그런 말없는 배웅은 제게 큰 힘이었습니다. 어디서나 언제나 어머니가 지켜보신다는 게 말없는 버팀목이었던 듯합니다.
인간에겐 항상 그렇게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삶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제가 어른이 된 후였습니다. 그런 어머니는 늘 학교에서 돌아오면 당근이 들어간 야채빵을 만들어 주시곤 했지요. 대문을 들어서며 “엄마!” 하고 문을 박차며 외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요.
어쩌다 “그래, 학교 다녀왔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마치 집안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허전함 때문에 이 방 저 방 기웃거리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아이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네요. 아이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하는 것은 물론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아이는 으레 엄마가 집에 있다는 것을 기대할 수 없으니까요.
“엄마, 오늘은 언제 들어와요?”
학교에서 돌아와 전화를 거는 것이 고작 아이의 기쁨일 겁니다. 이렇게 엄마 노릇 하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인지 매일매일 반문합니다.
나를 지탱해 준 힘
어머니는 어린 저에게 늘 옷을 손수 지어 입히셨습니다. 겨울에는 뜨개질한 스웨터를, 여름이면 시원한 면으로 된 블라우스를 만들어 입히셨지요.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옷을 입고 나서면 그 독특함과 유일함 때문에 사람들은 늘 내게 그 옷 누가 짜 준 것이냐 누가 만들어 준 것이냐고 묻곤 했습니다.
그때 저는 왜 사람들이 꼬치꼬치 그런 것을 묻는지 잘 몰랐습니다. 옷은 당연히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제 옷을 만들기 위해 자주 패션잡지를 사다가 보시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제일 잘나가던 패션잡지가 일본에서 만든 <주부의 벗>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그 잡지를 보면서 이 옷이 예쁘다고 하면 얼마 안 있어 그와 같은 옷을 재봉질하거나 뜨개질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해마다 어쩌면 이렇게 키가 쑥쑥 크냐”며 새로 지은 옷을 가져다 대어 보고는 흐뭇해 하시던 어머니의 손길과 미소. 그 손길과 미소에서 한없는 사랑을 느끼며 컸다는 것을 이제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제 아이에게 직접 옷 한 벌 만들어 주지 못하고 저는 “이 옷 입어라 저 옷 입어라” 참견만 하지요. 그런 저와 비교하면 어머니가 제게 베풀어 주신 사랑과 교육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힘이요, 저를 지탱하는 근원이었다는 것을 이제 와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엄마! 학교 다녀왔어요!”라고 외치던 딸이 이제 나이 오십 되어 다시 크게 외칩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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