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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독립운동가 “박찬익 박영준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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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8-01 07:08 조회7,8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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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贊翊1884(고종21)--1949             오창공 후 족보(3권 27)
독립운동가
자 정일 호 남파
경기도 파주출신
광무10(1906) 신민희에 가입 민족운동을 벌이고
     1910) 한일합방으로 만주에 망명     대종교의 正敎로 있으면서 화룡현 삼도구에
             한인학교르 세워 교육사업에 종사행사했다
             서로군정서의 요직을 역임하고 상해로 건너가 신규식등과 동제사를 조직했다
     1920) 임시전부 의정원 의원이 되고
     1921) 임시정부 대표로 광동정부에 파견되었다가    
     1940) 임시정부 법무부장 이 되었다
     1948) 귀국
     1949) 서울에서 병사
     1963) 건국 공로훈장 단장이 수여 되었다
(朴贊翊/1884.1.2~1949.3.9)
독립운동가. 자 정일(精一). 호 남파(南坡). 경기 파주(坡州) 출생.
1906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1910년 국권피탈 후 북간도(北間島)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의 정교(正敎)로 있으면서 허룽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에 한인학교를 세우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요직을 거쳐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고, 이듬해
1921년 임시정부 대표로 광둥[廣東]정부에 파견, 1940년 임시정부 법무부장이 되고,
1948년 광복된 조국에 돌아왔으나 뜻을 펴지 못하고 이듬해
1949년 서울에서 병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朴英俊(1915--2000) 족보(3권 574쪽)
임시정부 의 외곽단체인 한국광복전선 청년공작대를 시작으로 한국광복군 제3지대 훈련총대장 등을 지내며 항일운동을 벌였다. 한국전력주식회사 사장 광복회고문 등을 역임했다.
백범기념사업회장을 지낸 애국지사 박영준翁 이 2000년3월27일 오전 8시 삼성서울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85세
1977 ;건국훈장 독립장 수상
아들; 박천기
딸 ; 박天敏(대원예고 교사)    사위 이흥권(인천지법 부천지원장)
                                                                 (중앙일보 2000/4/1)
2000년 3월27일 타계한 애국지사 박영준(85 예비역 소장)옹 은 1930년대부터 중국에서독립군으로 활약했고, 건군이후에는 초대 장훈감을 지낸 군의 원로다.
특히 박장군의 부친은 상하이 임시정부 법무부장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한 남파 박찬익(48년 작고)선생이어서 이들은 부자 독립운동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4남2녀중 막내로
1915년 중국 퉁징(용정)에서 태어난세서 태어난 박장군은 어린 시절 아버비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15세 때인
1930년 상하아러 부작정 부친을 찾아가 독립운동가로서의 길를 걷기 시작했다,
     부친의 명을 받고 박장군은
1938년 지하 항일조직인 한국광복진선을 결성했다.
1942년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임관한후에는 대일무장 투쟁을 하기도했다,
1943년 신규식의 질녀이자 임정요인인 신건식의 딸인 순호(79)와 결혼했다.
     순호씨는 “당시임정 지도자들이 한데 모여살았기 때문에 자녀들도 자연 스렵게 가까워졌다” 면서 “그분은 매사에 적극적이고 정열적이었다‘ 고 회고 했다,
1945년 박장군이 광복군 제3지대 1구대장을 맡았을 때 동료였던 장호강장군은 “당시 조국을 찾겠다는 박장군의 뜨거운 의지에 부하들은 물론 동료들도 감동했다,”고 회심했다.
해방후 박장군은 3년간 중국에 남아 현지 한국인 보호에 주력했다. 중국인 탄압에 앞장섰던 일부 한국인들이 ‘망국노로 불리며 잡단 테러의 대상이 됬기 때문이다.
     박장군이 평소에 “우리민족이 다시는 망국노(忘國奴) 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 것도 이같은 배경과 무관치 않다.
1948년 귀국한 박장군은 12월 국군 소령으로 특별임관 했다. 광복군계급이 중령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강등된 셈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특히 건군 초기 국군 간부의 주력이 일본군 출신으로 짜여저 있었는데도 “새나라를 지키는데 과거는 중요치 않다”면서 이를 흔쾌히 수용했다.
1952년초 정훈감을지낸 박장군은
1961년 현역으로 한국전력사장에 임명 됬다가 63년 사장직에서 무러났다. 이후 광복군동지회 회장 백범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
    딸 천민씨는 “평소에는 다정하고 자상했지만 아버지의 출퇴근시에는 문앞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고 규율을 중요시하는 박장군의 단면을 전했다.
    박장군은 지난달 29일 부친의묘소가 있는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족보>

동량(오창공)-미(금양위)-세교-태두-필하-사정-형원-종악(우의정)-만수-제민-대양-영주-봉서-찬익-영준-천기.천민

영준 호 남정(南庭) 을묘(1915) 11월 1일생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부이재과장
광복군 지대장 국군사단장. 육군소장
한국전력사장.
금성충무훈장
미 리존어브메릴방위보장, 근무공로훈장. 중화학술원명예철학박사
건국공로국민훈장
O 配 고령 신순호 父 건식 임시정부재무차장
임술(1922) 1.22일생 중국중경 尙傳졸
建國功勞襃章受章(건국공로포장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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