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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8월의 독립운동가 " 박찬익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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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8-01 06:52 조회5,378회 댓글0건

본문

(동아일보)
국가보훈처는 일제강점기에 임시정부에서 대(對)중국 외교활동에 힘쓴 박찬익 선생(1884∼1949·사진)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해 31일 발표했다. 경기 파주에서 출생한 선생은 1911년 만주로 망명해 남만주 지역 최초의 독립운동 조직인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설립을 주도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선생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외무부 외사국장 겸 외무차장 대리를 거쳐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법무부장으로 활동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중앙일보)
국가보훈처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 겸 외무차장 대리로 대(對)중국 외교활동에 힘쓴 박찬익(朴贊翊.1884~1949)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

경기 파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1904년 서울의 농상공학교에 입학했으나 일본인 교사와의 마찰로 학교를 그만둔 뒤 보안회에 참여, 일제의 황무지개척 요구에 반대투쟁을 하며 민족문제를 자각하기 시작했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대종교를 받아들이고 대종교 포교와 독립운동에 온 힘을 쏟았다.

남만주 지역 최초의 독립운동 조직인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가해 독립군 기지 건설에 앞장섰고 청일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신흥무관학교에서 한국역사와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에 39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해 대한독립의지를 천명한 선생은 한성임시정부 평정관을 시작으로 상하이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 겸 외무차장 대리로 뽑혀 정부의 외교 임무를 전담했다.

1940년 10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자 법무부장에 선출됐고 이후 임시정부의 좌우합작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선생은 해방 후 임정 요원과 동포들의 귀국을 돕는 등 민족의 안녕을 위해 헌신했으나 1948년 초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만류하고자 급히 귀국했다 이듬해 3월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연합뉴스)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이다.

1904년 관립 상공학교(商工學校)에 재학 중 국권회복을 위하여 수차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퇴학당하였다. 1907년 초에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 활동하였다.

그 뒤 1908년 4월 다시 관립공업전습소(官立工業專習所)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이때 나라를 일제에 강점 당하자 동지 박승익(朴勝益) 등 10여 명과 같이 저항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역부족, 그해 겨울 만주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북간도에서 독립투쟁가 이상설(李相卨) 백 순(白純) 등의 지도로 독립투쟁을 계획하는 일방 대종교 도사교(都司敎) 나 철(羅喆)의 권유로 대종교에 입교, 교인으로 활동하였다.

1912년에는 중국 관헌의 지원을 얻어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청파동(靑坡洞)에 한국인학교를 설치하고 애국과 자립 사상을 고취하였다. 동시에 대종교의 정교(正敎)직을 맡아보면서 포교에도 성의를 보였다. 어느 것이나 민족독립운동의 일환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후 상해로 건너 가 손 문(孫文)을 따라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참가하여 만청(滿淸)정부를 타도한 신규식(申圭植)과 함께 1912년 7월에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박은식(朴殷植)을 총재로 추대하였으며, 신채호(申采浩) 김규식(金奎植) 이 광(李光)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중심기구로 발전시켜 나갔다.

1918년 11월에는 만주 길림(吉林)에서 김교헌(金敎獻) 김동삼(金東三) 조소앙(趙素昻) 이동녕(李東寧) 등 39인이 "대한독립선언"을 발표하였는데 그도 39인 중 1인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상해로 갔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4월 23일 서울의 국민대회에서 한성 임시정부가 조직되었을 때는 박은식 신채호 손정도(孫貞道) 조성환(曺成煥) 등과 함께 평정관(評政官)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21년 7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外事局長) 겸 외무차장 대리로 외교임무를 실질적으로 전담하였으며 주로 대중국 외교에 주력하였다. 특히 중국 국민당의 손 문(孫文)이 광동(廣東)에 중국호법정부(中國護法政府)를 수립하자 외교총장 신규식(申圭植)을 수행하여 임시정부를 승인 받는데 기여하였으며, 1922년 2월에는 광동에 주재하여 호법정부와의 외교를 전담하기도 하였다. 1923년 4월에는 외사국장으로서 봉천에 특파되어 재만주 독립운동을 지원할 수 있도록 중국정부 관리와 외교 접촉을 벌였다.

이후 임시정부를 뒷받침하는 대중(對中)외교를 계속하였으며, 1930년에는 한국국민당 조직에 참여하고, 동년 12월에는 대한독립당 대표로 남경(南京)정부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1931년 5월에는 남경의 국민당 전당대회에 임시정부 대표로 안호상(安浩相)과 함께 참석하여 만주 동삼성(東三省)의 독립운동 문제를 거론하였으나 일군의 만주 침략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 후 임시정부를 안전하게 이동시키기 위하여 중국정부와 교섭하여 많은 지원을 받았으며, 1932년 6월에는 다시 상해로 잠입하여 일제 앞잡이를 처단하는 등 부단한 활동을 벌여 옥관빈(玉觀彬)과 상해 한인(韓人)친우회 위원장으로 일경의 밀정 노릇을 하던 유인발(柳寅發) 등을 저격 처단하는 계획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한국독립당 남경지부의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중앙군관학교와 낙양군관학교에 독립군 간부 양성과정을 설치하는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1939년에는 다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 임정이 중경(重慶)으로 옮긴 뒤에는 법무부장,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어 광복시까지 임시정부의 중책을 역임하였다. 한편 1942년 10월에는 김규식(金奎植) 신익희(申翼熙) 김성숙(金星淑) 김원봉(金元鳳) 엄항섭(嚴恒燮) 등과 함께 한중문화협회의 한국측 이사로 선임되어 한 중친선에 기여하였으며, 1943년 5월에는 김 구(金九) 홍 진(洪震) 유동열(柳東說) 조소앙(趙素昻) 이청천(李靑天)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8 15 광복 후에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장(駐華代表團長)으로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공적 출처 : 민족정기선양센터)


[출처] 독립기념관 애국시비 - 박찬익 편(11)|작성자 부산지방보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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