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수
  • 오늘180
  • 어제1,165
  • 최대1,363
  • 전체 308,379

자유게시판

계곡 휘장유 찬 오창공 묘지명

페이지 정보

no_profile 박찬승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7-19 17:00 조회3,933회 댓글0건

본문

오창공 묘지명 계곡 찬
: 박찬승




錦溪君朴公墓誌銘




朴氏爲三韓氏族之冠。本出羅祖。羅亡而子孫散處四方。其以羅之潘南爲望者。公之先也。麗季有 聞人。曰尙衷。官判典校寺事。坐直道纍死。是生平度公訔。事我太宗。官左議政錦川府院君。四世而至諱兆年。吏曹正郞。贈左贊成。生諱紹。早以文行著名。周旋於己卯諸賢。官終司諫院司諫。贈領議政。有五子皆顯。其第四曰大司憲應福。累贈領議政。娶善山林氏。贈左承旨九齡之女。是爲公之考妣。公諱東亮。字子龍。幼而穎秀。甫成童。文藻蔚然。己丑。中上舍選。明年。擢文科。初隷承文院。尋薦入藝文館。歷檢閱待敎。至奉敎。會當薦新進入史局。公首推轂李公廷龜。而盡絀權貴所屬 意者。大爲所忤。言路遂劾李公削其薦。而倂推考擧主。公對簿無撓辭。竟被奪告身。未幾敍復。壬辰。陞戶曹佐郞。轉兵曹。分掌馬曹。夏倭寇大至。將士征行相續。騎乘佗負凡用馬。皆取足於公。而無不立辦。比至播遷。軍營餘馬尙以千數。宣廟西狩。公隨駕夜渡臨津。上獨坐船上。宿衛皆散。公與都承旨李公恒福。手一炬行。且呼召得六十餘人。車駕始成。行次松都。公與判書金公應南同直。衛士夜驚。金公倉黃欲排門出。公持止之。良久乃定。自是金公服公膽量。每有事。必以屬公。兼備邊 郞。俄遷正言。大臣以備局事重。啓遞因舊。臨津師潰。賊進逼平壤。上召群臣問計。皆請幸咸興。獨尹公斗壽,李公幼澄。欲死守浿江。公與之意合。力爭之不得。平壤民。聞大駕將出。擁路大噪。且有變。公遽見承旨曰。衆怒難犯。請姑停行慰遣之。然後乃可發也。從之。上旣決計渡遼。命光海分朝。朝臣多隷分朝。從駕者纔十餘人。公遂兼綰六曹通符。又兼春秋館漢學敎授,內乘等任。每駕行遇險。公輒挺身馳出駕前奉引。大憲公在路病 。公乞留侍疾。上許之。大憲公聞命驚 起。疏言臣老病。力不任羈靮。誠不忍又使臣之子先父而後君也。遂促公隨駕。拜吏曹佐郞,知製敎。陞正郞。公雖居郞署。實與聞機密。酬應衆務。敏給中窾。每得一籌策。必爲廟堂陳之。多所裨益。自宰相以下。無不器重之。公素善華語。方天將輻湊。上日與之接遇。公以御前通事入侍。辭令嫺雅。應對稱旨。上益奇公之才。恩意密勿。如家人父子。自柄臣坐誤國逬黜。持淸議者。臧否彌峻。人多不安。公在銓。專務持平調劑之。注擬之際。無復畦畛。褊心者或不悅。公引疾不出。先輩耆宿憂 之。勸起甚勤。勉以世道。其爲諸公所重如此。龍灣素多聲伎。從官客居經歲。多狎遊不檢。獨公與李公恒福同舍。杜門索處。人以爲難。解銓爲成均直講。尋復入銓爲正郞。癸巳冬。超陞承政院同副承旨。時年二十五矣。懇辭不獲。序陞至左承旨。遞歸散班。兼承文院副提調。累轉刑曹參議兵曹參知。及授都承旨。辭不拜。自兵曹參議移戶曹。時相欲引公同事。爲設備邊司副提調以授之。公力辭不就。轉成均館大司成。尋如京師賀至。復命。復爲兵曹參議。丁酉。倭警復急。王妃出次遂安郡。公 用肺腑扈行。尋以都承旨召還。宣廟將南幸堤川。應援天兵。堤去賊壘不遠。或謂天將且挾上親征。朝臣當從者皆懼。公時不在選中。上疏請從。旣而上不果行。戊戌。進階嘉善。爲親老乞外。拜延安府使。丁大憲公憂。庚子外除。以護軍兼摠管。懿仁王后薨。因山將卜。輒爲妖說沮敗。公疏論之。拜司憲府大司憲。轉吏曹參判。用人必先老成。論者稱得體。兼同知春秋館經筵事。遞授禮曹參判。拜京畿觀察使。病甚辭遞。公之病也。宣廟遣御醫視疾。恩禮甚備。疾愈。乞郡奉母。不許。華使顧 天峻,崔廷健來頒詔。黷貨無藝。擧國大窘。會畿伯缺。復以授公。公調度有方。事辦而民不告病。遞貳禮曹。出爲江原道觀察使。關東素少事。公爲之若無爲者。魯山君墓在寧越。行部過郡。爲躬酹之。尋徵還。參判刑曹。啓陳中廟遣承旨祭魯山墓故事。上卽從之。累拜都承旨,戶兵二曹參判。甲辰。將錄亂後三功臣。公建議以爲吾輩執靮微勞耳。以視力鬪殺賊者。不翅不如。宜加錄武功以慰戰士。事雖不行。聞者韙之。以都監提調。管扈聖,宣武兩原從。甄別精當。濫僞無所容。秋行功臣 封賞。賜公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號。超階資憲。封錦溪君。兼知春秋館事。尋由右參贊。拜戶曹判書。公謂國家理財無法。入狹而出闊。方欲與僚貳之練事者。裁度源委。定爲經制。無何而出爲平安道觀察使。公素長於理劇。能以餘力。課學子閱戎士。各有條序。左右具宜。每按部所至。詢疾苦賑困乏。緣江要害。積氷成城。以遏虜衝。閫帥成允文。恃奧援橫恣不法。公詰問得實。具聞于朝。竟絀允文。族子燁爲府庶尹。薄有治辦聲。而酷暴嗜殺。鐫責不悛。遂啓罷之。歲滿遞還。戊申。宣廟 大行。以公爲守陵官。冬遭林夫人喪。公號擗出外。以俟朝旨。光海初許遞。公聞命奔喪。未幾。有旨促還。公身持君親兩服。易戚兼盡。林夫人將葬。暫許歸視。用恩例三進階。至崇祿大夫。方喪制盡。歸赴林夫人喪次。辛亥服闋。以原封兼都摠管判義禁府事。鄭仁弘疏 文元,文純二先正。公爲上疏辨斥。鳳山守申慄嗾人上變。士夫多見逮。桁楊相枕。公心愍之。有可以辨其枉者。輒隨事爲之地。爾瞻之徒。側目嗛之。光海忽下敎曰。人臣護逆。宜同逆律。判義禁某。營救逆賊。其遞金吾。爾瞻使其黨劾 請拿鞫。光海只命削職。癸丑大獄起。囚羊甲誣引延興爲禍首。而連及所謂七臣者。方宣廟大漸。已慮永昌異日之禍。爲手敎二通。一付光海。令善視同氣。一以賜七宰臣。使保護大君。而奸人樂禍者。煽蜚語謂閔閹希騫與柳永慶。矯作遺敎。禍機之伏。久矣。至是發於羊甲之供。光海猶不下逮命。言官柳活等。承權奸指。論七臣奉承矯旨。不自辨明。削去仕版。旣而有鄭浹之誣。公與諸名公。同就逮對。獄訖見釋。至丙辰秋。廢母之論復起。公與諸名公。同被謫配牙山縣。辛酉宥還。癸亥靖社。 始復勳封。初宣廟久寢疾。巫言祟在裕陵。就陵下作法祈禳。而宮奴女巫之主其事者。實裕陵時受恩人也。諸朴憤欲捕治之。其人皆爲延興所庇。公嘗使人風意。延興不許。公心恨之。及癸丑逮繫。訊辭謂與延興水火相救。公擧前事。以明素與延興不相悅者而已。群兇捃摭其語。攙入頒敎中。以證成延興罪狀。浸浸上累長信。與公有纖芥者。乘機傅會。遂以深文中公。唯白沙,玄軒二公。明知本末。證公無它腸。而訾謷者執謬聞。猶有未盡舍然也。至是群議蝟起。請圍籬安置。配康津縣。李 相國元翼,鄭參贊曄,李延平貴。嘗陳公冤狀而不能得。公聞謫命。逌然就途。命家人以衣衾自隨。以備後事。乙丑。命撤圍。丁卯。量移扶安。壬申。內徙忠原。癸酉。放歸田里。公在謫十年所。旣歸。神觀康茂。方買屋江上。爲終老計。一夕暴疾不起。乙亥二月某日也。得年六十有七。公英達夙成。才猷過人。當壬辰之難。眇然郞舍一少年耳。入侍帷幄。出贊謨畫。身兼數器。遇事風生。尤能濟以雅量。有老成之度。故前輩論中興人材。未有不以國器歸公者。比公遭譴謫。每國有緩急。論者欲起公委重寄。 以濟時艱。而格於時議。竟不行。公篤於內行。亡論庭闈色養。卽於丘嫂長姊。事之甚謹。與二兄相爲知己。塤篪之樂。人無間然。收恤宗族。親疏各滿其意。天資坦易任眞。其於矯激之行。表襮之飾。非唯身所不爲。見人有近是者。亦顰蹙不樂。與人交。淸濁無所失。遷謫所。居人皆敬信。旣去而無不追思者。性不喜玩好。平居一室翛然。雖茶鼎酒鎗之屬。一無所蓄。自癸丑以後。身遭百罹。流離嶺海。骨肉凋喪。而能委命理遣。不作隕穫慘悽之色。嘗曰內檢吾心。自覺無累。由外至者。我將如之何哉。少而 強記。觀書。數行俱下。視遠甚明。能於二十里外。辨認人物。乘除星命。射御諸藝。多所旁通。晩歲居閑。唯以黃卷自適。爲詩文。操筆立就。而調暢有致。遺稿二卷。藏于家。公旣沒。諸子上章訟冤。事下有司。覆按如章。詢于大臣。議乃僉同。遂復公官封。公初葬于某地某山。形家胥原曰。於法不宜。遂用某年月日。改葬于某地某原。遷夫人之墓而就祔焉。夫人驪興閔氏。左承旨善之女。自在室。端操粹穆。舅白沙李公。每稱女士。及歸于公。上事下敎。動遵禮則。從公于康津謫廬。乙丑五月某日。以疾卒。年五 十六歲。育四男三女。男長曰瀰。尙貞安翁主。封錦陽尉。次漪。文科正郞。次濰。才而夭。次澬。女長適大司成李明漢。次適參奉洪處深。次適參奉柳誠吾。錦陽有男世橋。漪有二男一女。濰,澬。皆無子。李明漢有四男一女。曰一相。修撰。嘉相。進士。餘幼。洪處深二男二女。柳誠吾一女。皆幼。公有側室一男。亦幼。維與錦陽伯仲。實有伍擧,聲子之好。銘詞之託。義無可辭。銘曰。
刜鍾之器。歷塊之駟。用無不利。惟忠惟勤。協濟艱屯。中興藎臣。弱通壯顯。未衰而蹇。枯菀婁嬗。曷其 玷而。矧旣磨之。連城靡虧。槐棘聽平。言信有徵。我銘以貞

금계군 박공 묘지명(錦溪君朴公墓誌銘)



박씨(朴氏)는 삼한(三韓)의 씨족 가운데 으뜸을 차지하는데 그 근본이 신라(新羅)의 시조(始祖)로부터 비롯되었다. 신라가 망하고 나서 자손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았는데 나주(羅州)의 반남현(潘南縣)에서 망족(望族)을 이루고 거한 이가 바로 공의 선조이다.고려 말에 이름을 날린 이로 상충(尙衷)이 있는데 관직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이르렀고, 바른 일을 행하다가 죄망(罪網)에 걸려들어 옥사(獄死)하였다. 그 아들이 평도공(平度公) 은(訔)으로 우리 태종(太宗)을 섬겨 좌의정을 역임하였으며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봉해졌다.4세를 지나 휘(諱) 조년(兆年)에 이르러 이조 정랑으로 좌찬성을 증직받았다. 여기에서 휘 소(紹)가 태어났는데, 일찍부터 문행(文行)으로 이름이 드러나 기묘의 제현(諸賢)과 함께 일하다가 사간원 사간으로 관직 생활을 마쳤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다섯 아들 모두가 현달(顯達)하였는데 넷째가 대사헌 응복(應福)으로서 누차 증직되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좌승지를 증직받은 구령(九齡)의 딸 선산 임씨(善山林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이분들이 바로 공의 고비(考妣)이다.공은 휘가 동량(東亮)이요, 자(字)는 자룡(子龍)이다. 어려서부터 특출한 자질을 보이며 겨우 성동(成童)의 나이가 되었을 때 벌써 문재(文才)가 성대하게 드러났다. 기축년에 상사(上舍 성균관)의 선발에 뽑힌 뒤 곧바로 이듬해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 승문원에 소속되었다가 뒤이어 천거를 받고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과 대교를 역임한 뒤 봉교에 이르렀다.그때 마침 신진(新進)을 천거하여 사국(史局)에 들여보낼 일이 생겼는데 공이 맨 먼저 이공 정귀(李公廷龜)를 추천하면서 권귀(權貴)가 부탁했던 자들을 모조리 물리쳐 버려 그들의 미움을 크게 사게 되었다. 이에 언로(言路)에서 마침내 이공을 탄핵하여 추천받은 것을 무효화시키는 동시에 천거한 사람까지 추고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공이 대부(對簿 서면으로 사실 조사를 하는 것)할 적에 이르러서도 바른 말을 굽히지 않아 결국 고신(告身)까지 뺏겼다가 얼마 뒤에 다시 서용(敍用)되었다.임진년에 호조 좌랑으로 승진했다가 병조로 옮겨 말[馬]에 대한 사무를 분담하게 되었다. 여름에 왜적이 대거 침입해 오자 싸움터로 나가는 장사(將士)들의 행진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는데, 전투와 수송에 필요한 마필(馬匹)의 수요 일체를 모두 공에게 요구해 왔으나 그 즉시로 마련해 주지 않은 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파천(播遷)할 즈음에 이르러서도 군영(軍營)에 남아 있는 말들이 아직도 1천 필을 헤아렸다.선묘(宣廟)가 서쪽으로 몽진(蒙塵)할 적에 공이 어가(御駕)를 수행하여 밤에 임진강(臨津江)을 건넜는데, 상 홀로 배 위에 앉아 있을 뿐 숙위(宿衛)하는 자들이 모두 흩어지고 없었다. 이에 공이 도승지 이공 항복(李公恒福)과 함께 횃불 하나를 손에 들고 가면서 불러모은 결과 60여 인을 얻어 비로소 거가(車駕)의 체모를 이루었다.행차가 송도(松都)에 머물렀을 때 공이 판서 김공 응남(金公應南)과 함께 숙직을 하고 있었다. 그때 위사(衛士)가 밤중에 놀라자 김공이 어쩔 줄을 모르며 문을 밀치고 나가려 하였는데 공이 붙잡아 만류하니 한참 지나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이로부터 김공이 공의 담력(膽力)에 탄복하고는 일이 있을 때마다 꼭 공에게 부탁하곤 하였다.비변사 낭청을 겸하였다가 얼마 뒤에 정언으로 옮겨졌는데, 대신이 비국(備局)의 일이 중하다고 아뢰어 체직된 뒤 예전의 관직을 그대로 수행하였다.임진강의 수비 군사가 무너지면서 왜적이 평양(平壤)으로 육박해 오자 상이 신하들을 불러 계책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모두들 함흥(咸興)으로 행행하기를 청하는 가운데 오직 윤공 두수(尹公斗壽)와 이공 유징(李公幼澄)만이 패강(浿江)을 사수(死守)하자고 하였는데, 공도 이들과 뜻을 합쳐 강력하게 쟁집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평양 백성들이 장차 대가(大駕)가 떠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길을 막고 크게 소란을 피우면서 변란이라도 일으킬 것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공이 급히 승지를 만나보고 말하기를,

“군중의 분노를 그대로 맞닥뜨리는 것은 곤란하다. 우선 행차를 정지하고 위로해 보낸 다음에 출발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상이 이 말을 따랐다.상이 이미 요동(遼東)으로 건너갈 계획을 굳히고는 광해(光海)에게 분조(分朝)를 차릴 것을 명하였는데, 조신(朝臣)들 대부분이 분조에 소속되었으므로 대가를 따르는 자들은 겨우 10여 인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공이 마침내 육조의 통부(通符)를 통괄하는 동시에 춘추관ㆍ한학 교수(漢學敎授)ㆍ내승(內乘) 등의 임무를 아울러 수행하게 되었는데, 대가가 험난한 길을 만나게 되면 공이 번번이 앞장서서 대가 앞으로 달려 나가 상을 모셔 인도하곤 하였다.대헌공(大憲公 박동량의 부친)의 병세가 도중에 위급해지자 공이 뒤에 남아 병구완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대헌공이 이 명을 듣고는 깜짝 놀라 일어나서 상소하기를,

“신이 늙고 병든 나머지 힘껏 모시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데, 또 신의 아들로 하여금 아비 일 때문에 임금 모시는 일을 뒤로 미루게 하는 일은 정말 차마 할 수 없습니다.”
하고는, 마침내 공을 다그쳐 대가를 수행하게 하였다.이조 좌랑과 지제교에 임명된 뒤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공이 낭서(郞署)에 있긴 하였지만 실제로 기밀(機密)한 정무(政務)에 참여하여 여러 가지 업무를 처리하면서 민첩하게 진행시켜 나갔고, 하나의 계책이 생각날 때마다 꼭 묘당에 개진하여 도움준 일이 또한 많았으므로 재상 이하가 모두 공의 그릇을 인정하며 중하게 여겼다.공은 평소 중국어를 잘하였다. 바야흐로 중국 장수들이 일제히 몰려들어 상이 날마다 그들을 접견하는 상황에서 공이 어전통사(御前通事)로 입시하여 외교적으로 품위있게 응답하며 뜻에 맞게 응대하곤 하였으므로 상이 더욱 공의 재주를 기특하게 여겨 친근하게 은총을 쏟으면서 마치 한집안의 부자지간처럼 대해 주었다.권력을 쥔 신하가 나라를 그르친 죄에 걸려 축출되고 나서부터 청의(淸議)를 견지하는 이들의 선악의 구분이 더욱 준열해졌으므로 사람들 대부분이 불안하게 여겼다. 이때 공이 전조(銓曹)에 몸담고 어디까지나 공평한 자세로 조정하려고 노력하면서 주의(注擬)할 때에 다시 구분을 두려고 하지 않았는데, 마음이 편협한 사람들이 혹 좋아하지 않자 공이 병을 핑계 대고 출사하지 않았다. 그러자 선배 기숙(耆宿)들이 염려하면서 매우 자상하게 다시 업무를 살피도록 권유하며 세도(世道)를 들어 면려(勉勵)해 주었으니, 공이 제공(諸公)으로부터 중하게 여김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용만(龍灣)은 평소 가기(歌妓)가 많은 곳이었는데, 관직을 따라 여러 해 동안 객지 생활을 하다 보면 몸단속을 하지 않고 마냥 어울려 노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유독 공과 이공 항복(李公恒福)만은 숙사를 같이하면서 문을 닫고 조용히 거했으므로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들 하였다.전조(銓曹)에서 물러나와 성균관 직강이 되었다가 뒤이어 다시 전조에 들어가 정랑이 되었다. 계사년 겨울에 자급(資級)을 뛰어넘어 승정원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는데 공의 나이 25세 때의 일로서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뒤 차서대로 승진하여 좌승지에 승진하였고, 체직되어 산반(散班)으로 돌아간 뒤 승문원 부제조를 겸했으며, 누차 전직(轉職)하여 형조 참의와 병조 참지를 거치고 나서 급기야 도승지를 제수받았는데 사양하고 숙배하지 않았다.병조 참의에서 호조로 옮겼을 때 당시 정승이 공을 끌어다가 함께 일할 목적으로 비변사 부제조 자리를 설치하고 이를 공에게 맡겼으나 공이 극력 사양하면서 응하지 않았다. 성균관 대사성으로 옮겨지고 나서 곧바로 경사(京師)에 가 동지(冬至)를 하례(賀禮)하였으며 복명(復命)한 뒤 다시 병조 참의가 되었다.정유년에 왜적의 경보(警報)가 또다시 급해짐에 따라 왕비가 대궐을 나가 수안군(遂安郡)에 머무르게 되자 공이 폐부(肺腑 왕실의 친족을 뜻하는데 의인왕후(懿仁王后)는 박동량의 사촌누님)로서 호종(扈從)하였다가 뒤이어 도승지로 소환하는 명을 받았다. 이때 선묘(宣廟)가 장차 남쪽으로 행행하여 제천(堤川)에 가서 중국 군사를 응원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제천이 왜적의 보루(堡壘)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데다가 어떤 이가 말하기를 ‘중국 장수가 상의 친정(親征)을 권할 속셈으로 있다.’고 하였으므로 조신(朝臣) 중에 따라가기로 되어 있는 자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공이 이때 선발 대상에 들어 있지도 않은 상황에서 상소하여 뒤따라가게 해 줄 것을 청했었는데, 그 뒤에 실제로 상은 그곳에 가지 않았다.무술년에 가선대부로 자계(資階)가 올랐다. 노친을 봉양하기 위해 외직(外職)을 청해서 연안 부사(延安府使)가 되었는데, 그때 대헌공(大憲公)의 상을 당하였다. 경자년에 외방에 제수되어 호군(護軍)으로 총관(摠管)을 겸하였다. 의인왕후(懿仁王后)가 훙(薨)하여 인산(因山)의 길지(吉地)를 가릴 때 번번이 요설(妖說) 때문에 일을 그르치자 공이 상소하여 이를 논하였다.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이조 참판으로 옮겨졌는데 사람을 임용할 때 반드시 노성(老成)한 인물을 먼저 취했으므로 논하는 자들이 체례(體例)를 얻었다고 일컬었다. 동지춘추관 경연사를 겸하였다가 체직되어 예조 참판을 제수받았고, 그 뒤 경기 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병이 심해져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공이 병들었을 때 선묘가 어의(御醫)를 보내 병을 돌보게 하는 등 매우 융숭한 은례(恩禮)를 가하였다. 병이 낫자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수령으로 나갈 것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중국 사신 고천준(顧天峻)과 최정건(崔廷健)이 와서 조칙(詔勅)을 반포하였는데, 뇌물을 요구하는 것이 한정이 없었으므로 온 나라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기백(畿伯)의 자리가 비어 있었으므로 다시 공을 임명하였는데, 공이 요령 있게 조달한 결과 일도 잘 마무리지으면서 백성들도 고통을 호소하지 않게끔 되었다.체직되어 예조 참판이 되었다가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 관동(關東) 지방은 평소 일이 적었으므로 공이 일을 해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다. 노산군(魯山君)의 묘소가 영월(寧越)에 있었으므로 관내를 순행하다가 그 고을에 들러 직접 제사를 지내었다. 뒤이어 부름을 받고 돌아와 형조 참판이 되었는데, 이때 그 일을 아뢰면서 중묘조(中廟朝)에 승지를 보내어 노산의 묘소에 제사를 지냈던 고사를 진달드리자, 상이 즉시 따랐다. 그 뒤 거듭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호조와 병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갑진년에 장차 왜란과 관련된 3등급의 공신(功臣)을 책훈(策勳)하는 일이 있게 되었다. 이때 공이 건의하기를,

“우리들은 고삐를 잡고 수행한 조그마한 노고가 있었을 따름이니, 힘껏 싸워 왜적을 죽인 사람들에 비교하면 같잖은 정도일 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니 당연히 무공이 있는 사람들을 가록(加錄)하여 전사(戰士)를 위로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대로 행해지지는 않았으나 듣는 자들이 모두 옳게 여겼다. 공이 도감(都監)의 제조(提調)로서 호성(扈聖)ㆍ선무(宣武) 두 등급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을 가리는 일을 맡았는데, 정밀하고 온당하게 처리하면서 허위로 외람되게 끼여드는 일이 있을 수 없게 하였다. 가을에 공신의 봉상(封賞)을 행하였는데, 공에게는 충근정량 효절협책 호성공신(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의 칭호가 내려지는 동시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뛰어오르면서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졌다.지춘추관사를 겸하고 있다가 뒤이어 우참찬을 거쳐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때 공이 ‘국가의 재정 운용이 법도가 없어 수입은 적은데 지출만 많다.’고 하고는 바야흐로 일에 익숙한 동료 보좌관들과 함께 그 본말을 헤아려서 경상(經常)적인 제도를 정하려고 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다.공은 본래 번화한 지역을 다스리는 데에 능하였다. 그리하여 정사를 행하는 여가에 학업을 지도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면서 각각 조리가 있게 하고 좌우 모두 온당하게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관내를 순행하면서 이르는 곳마다 괴로운 일을 물어보고 고달픈 처지에 있는 자들을 구휼(救恤)해 주는가 하면, 강 연안의 요해지에 얼음을 쌓아 성(城)의 역할을 대신하게 함으로써 오랑캐가 노략질하지 못하게 막기도 하였다.이때 곤수(閫帥)인 성윤문(成允文)에 오원(奧援 중앙의 후원 세력)을 믿고서 제멋대로 불법을 자행하자 공이 힐문하여 실정을 캐낸 다음 사유를 갖추어 조정에 보고함으로써 마침내 윤문을 축출하였다. 또 족자(族子)인 엽(燁)이 부(府)의 서윤(庶尹)으로 있으면서 사무 처리를 잘한다는 이름을 얻기는 하였으나 너무 포악하게 굴며 예사로 사람을 죽이자 따끔하게 꾸짖었는데 반성하는 빛이 없자 마침내 조정에 아뢰어 파직시켰다. 그 뒤 임기를 다 채우고 나서 체직되어 조정에 돌아왔다.무신년에 선묘가 승하하자 공을 수릉관(守陵官)으로 삼았다. 겨울에 임 부인(林夫人 박동량의 모친임)의 상을 당하자 호곡(號哭)하고 벽용(僻踊)하며 밖에 나가 조정의 분부를 기다렸는데, 광해가 처음에 체직을 허락해 주자 공이 명을 듣는 즉시로 상차(喪次)에 달려갔다가 조금 뒤에 다시 속히 돌아오라고 재촉하는 분부를 받게 되었다.이렇게 해서 공은 임금과 어버이의 상복을 한꺼번에 입게 되었는데, 이척(易戚)을 모두 완벽하게 행하는 가운데주D-001 임 부인의 장례를 치를 즈음에야 잠깐 허락을 받고 돌아가 뵐 수가 있었다. 이에 공에게 은례(恩例)를 적용하여 세 차례나 품계를 올려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이르게 하였다.공은 임금의 상제(喪制)를 끝내고 임 부인의 상차에 돌아갔다. 신해년에 상복을 벗은 뒤 원래의 봉작을 가지고 도총관과 판의금부사를 겸하게 되었다. 이때 정인홍(鄭仁弘)이 상소하여 문원(文元 이언적(李彦迪))과 문순(文純 이황(李滉)) 등 두 분 선정(先正)을 비난하자 공이 상소하여 변호해 물리쳤다.그 뒤 봉산 군수(鳳山郡守) 신율(申慄)이 사람을 사주하여 상변(上變)케 한 결과 사부(士夫)들이 많이 연루되어 투옥되는 사례가 줄을 이었으므로 공이 마음속으로 안타깝게 여겼다. 그리하여 그 억울한 정상을 해명할 수만 있으면 번번이 일을 처리하면서 그들을 위한 소지를 마련해 주곤 하였으므로 이이첨(李爾瞻)의 무리들이 곁눈질을 하며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에 광해가 홀연히 하교하기를,

“인신(人臣)으로서 역모에 동조했다면 당연히 역률(逆律)을 똑같이 적용해야 할 것인데, 판의금 모(某)는 역적을 구해 주려고 손을 썼으니, 금오(金吾)에서 체차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자 이이첨이 한술 더 떠서 자기 패거리들을 시켜 탄핵을 하며 나국(拿鞫)하도록 청하였으나 광해가 단지 삭직(削職)만 시키라고 명하였다.계축년에 대옥(大獄)이 일어났다. 이는 죄수 서양갑(徐羊甲)이 연흥(延興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부친 김제남(金悌男)임)을 무함하여 화수(禍首)로 끌어들이면서 비롯되어 이른바 칠신(七臣)주D-002에까지 그 여파가 미친 사건이었다. 당초 선묘(宣廟)가 병환이 위독해지자 뒷날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화를 당하게 될까 미리 염려한 나머지 수교(手敎) 두 통을 만든 뒤 하나는 광해에게 주어 동기간을 잘 보살피게 하고 하나는 7명의 재신(宰臣)에게 내려 대군을 보호하게 하였었다. 그런데 화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간인(奸人)이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를,

“내시 민희건(閔希騫)과 유영경(柳永慶)이 유교(遺敎)를 허위로 작성한 이래로 오랜 세월 동안 화기(禍機)가 잠복되어 오다가 이때에 와서 양갑(羊甲)의 공초(供招)에 나타나게 되었다.”
하였다. 광해는 그래도 체포하라는 명을 내리지 않았는데, 언관(言官) 유활(柳活) 등이 권간(權奸)의 뜻을 받들어 ‘칠신이 거짓 유교를 받고도 스스로 해명하지 않았다.’고 논하자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이윽고 정협(鄭浹)의 무함이 있게 되면서 공과 여러 명공(名公)들이 함께 대질 신문을 받게 되었는데 옥사가 끝나면서 풀려나왔다. 그 뒤 병진년 가을에 폐모론(廢母論)이 다시 일어나 공과 여러 명공들이 함께 유배당하면서 아산현(牙山縣)에 귀양갔다가 신유년에 사유(赦宥)를 받아 돌아왔고, 계해년에 정사(靖社)의 의거가 이루어짐에 따라 비로소 훈봉(勳封)이 회복되었다.처음에 선묘가 오래도록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자 무당이 말하기를 ‘이 재앙의 빌미는 유릉(裕陵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능)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하자, 능 아래에 가서 술법을 행하고 재앙을 물리치려 하였다. 그런데 이 일을 주관한 궁노(宮奴)와 여무(女巫)로 말하면 실로 유릉 생전시에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이었으므로 박씨 문중에서 이를 통분스럽게 여긴 나머지 그들을 잡아 다스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모두 연흥(延興)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공이 언젠가 사람을 시켜 그 뜻을 은근히 전했었는데 연흥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공이 마음속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하였다.그러다가 계축년에 체포되었을 때에, 한 죄수가 신문을 받으면서 공과 연흥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서로 구해 주는 사이라고 말하였으므로, 공이 예전의 일을 거론하여 평소부터 연흥과 서로 좋아하지 않는 사이임을 밝혔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흉악한 무리들이 그 말을 주워 담아 반교문(頒敎文)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연흥의 죄상을 증거하는 자료로 삼은 다음 점차적으로 장신(長伸 한(漢) 나라 태후가 거처했던 궁전으로 여기서는 인목대비를 말함)에게까지 누가 미치게 하였다.그러자 평소 공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감정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 기회를 놓칠세라 견강부회(牽强傅會)하여 마침내 심각한 법 조항으로 공을 얽어 넣었는데, 오직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와 현헌(玄軒 신흠(申欽)) 두 공이 그 본말을 명확히 알고서 공에게 다른 속마음이 없다는 것을 증거해 주었으나, 헐뜯으려고 마음먹은 자들이 잘못된 풍문만을 고집하면서 의심을 풀기에는 미진한 점이 있는 것처럼 하였다. 이에 이르러 뭇 의논들이 고슴도치처럼 일어나면서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키기를 청한 결과 강진현(康津縣)에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이 상국 원익(李相國元翼)과 정 참찬 엽(鄭參贊曄)과 이 연평 귀(李延平貴)가 공의 원통한 정상을 개진해 보기도 하였지만 그대로 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공은 귀양을 보내는 명을 듣고도 낯빛을 변하지 않고 길을 떠나면서 가인(家人)에게 의금(衣衾)을 가지고 따라와 뒷일을 준비하라고 지시하였다. 을축년에 위리안치를 완화해 주라는 명을 받았고, 정묘년에 부안(扶安)으로 양이(量移)되었으며, 임신년에 더 안쪽으로 충원(忠原)에 옮겨졌고, 계유년에 와서 향리로 내쫓김을 당하였다. 공이 유배 생활을 한 기간은 모두 10년이었는데, 일단 향리에 돌아오고 나서는 신관(神觀)이 평온하였다. 그리고 바야흐로 강가의 집 한 채를 구입하여 만년(晚年)을 보낼 계책을 세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갑자기 병에 걸려 영영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이때가 을해년 2월 모일로서 향년 67세였다.공은 일찍부터 영채를 발하였으며 그 재질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고작 낭사(郞舍)에 몸담은 일개 소년이었지만 유악(帷幄)에 들어가 모시면서 계책을 내어 보좌하였고 한 몸에 몇 개의 직책을 겸하면서도 일처리하는 것을 보면 바람이 일어날 정도였다. 더욱이 아량(雅量)을 발휘하여 일을 진정시킴에 있어서는 노성(老成)한 풍도를 엿볼 수 있었다. 그래서 선배들이 나라를 중흥시킨 인재를 논할 때면 언제나 공에게 국기(國器)라는 칭찬을 돌리곤 하였다. 그리고 공이 견책을 받고 유배 생활을 하고 있을 즈음에도 나라에 위급한 상황이 벌어질 때면 논자들이 공을 다시 일으켜 중책을 맡김으로써 어려움을 극복해 보려고 시도하곤 하였지만 당시의 의논에 막혀 끝내 행해지지 못하고 말았다.공은 내행(內行)이 독실하기만 하였다. 어버이를 봉양함에 있어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가령 큰형수나 큰누이를 모시는 것도 매우 깍듯하였으며, 두 형과도 서로 지기(知己)의 관계를 형성하며 훈지(塤篪)처럼 화목하게 지냈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도대체 흠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종족을 거두어 보살펴 주곤 하였으므로 가깝거나 멀거나 각자 만족스럽게 여겼다.공은 천성적으로 소탈하고 진솔하였다. 그리하여 일부러 상식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거나 자기 과시를 하는 따위는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와 비슷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기라도 하면 얼굴을 찡그리며 좋아하지 않았다. 공이 사람과 사귈 때에는 청탁(淸濁)을 구별하지 않고 잘 대하였으므로 유배지로 옮겨 가서도 거주하는 사람들이 모두 믿고 공경하였으며 일단 떠난 뒤에도 추억하며 그리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완구(玩具)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서 평소 방 안에 홀로 무심히 앉아 있었을 뿐 차 끓이는 화로나 주기(酒器) 같은 것들도 일체 놔둔 것이 없었다.계축년 이후로 온갖 재앙을 당하여 궁벽한 땅으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골육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였건만, 모두 운명으로 돌리고 냉철하게 생각하여 해소시키면서 절망하거나 처참하게 여기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언젠가 말하기를,

“안으로 내 마음을 살펴 잘못이 없다고 스스로 깨달으면 그뿐이다. 밖에서 핍박해 오는 것이야 내가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하기도 하였다.공은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비상했으며 책을 볼 때에도 단번에 몇 줄씩 읽어 내려가곤 하였다. 그리고 멀리까지 볼 정도로 시력이 매우 좋아 20리 밖의 인물에 대해서도 곧잘 식별해 내곤 하였다.이 밖에 승제(乘除 수학으로 계산하는 것)나 성명(星命 사주 등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것), 활쏘기ㆍ말타기 등 여러 기예(技藝)에 대해서도 통달한 것이 많았다.만년에 한가히 지낼 때에는 오직 책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는 생활을 보내었다. 그러다가 시문(詩文)을 지을 때면 붓을 잡자마자 곧장 이루어 내곤 하였는데, 정취가 자연스럽게 우러나와 운치를 느끼게 하였다. 현재 공의 유고(遺稿) 2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공이 죽은 뒤에 여러 아들들이 소장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자 그 일을 유사(有司)에게 내려 처리하게 하였는데 조사한 결과 소장의 내용과 동일하였으며, 대신에게 물어보아도 의견이 모두 일치하였으므로, 마침내 공의 관작과 봉호를 예전대로 회복시켰다.처음에 공을 모지(某地) 모산(某山)에 장례지냈는데, 형가(形家 풍수지리를 보는 사람 지관(地官))가 지세를 살펴보고는 말하기를 ‘법(法)에 마땅치 않다.’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모년 월 일에 모지 모원(某原)으로 개장(改葬)하면서 부인의 묘소도 이곳으로 옮겨 와 부장하였다.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좌승지 선(善)의 딸이다. 규수 시절부터 몸가짐이 단정하고 엄숙하였으므로 외삼촌인 백사(白沙) 이공(李公)이 늘 여사(女士)라고 칭찬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공에게 시집을 와서는 윗사람을 섬기고 아랫사람을 인도함에 있어 예의와 법도에 어긋나게 하는 일이 한번도 없었다. 그 뒤 강진(康津)의 유배지로 공을 따라갔다가 을축년 5월 모일에 병들어 죽었는데, 그때의 나이가 56세였다.슬하에 모두 4남 3녀를 두었다. 장남 미(瀰)는 정안옹주(貞安翁主)에게 장가들어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졌고, 차남 의(漪)는 문과에 급제한 뒤 정랑으로 있고, 그 다음 유(濰)는 재질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고, 그 다음 아들이 자(澬)이다. 장녀는 대사성 이명한(李明漢)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참봉 홍처심(洪處深)에게 출가하였고, 그 다음은 참봉 유성오(柳誠吾)에게 출가하였다.금양은 아들 세교(世橋)를 두었고, 의는 2남 1녀를 두었으며, 유와 자에게는 모두 아들이 없다. 이명한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일상(一相)은 수찬이고 가상(嘉相)은 진사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홍처심은 2남 2녀를 두었고, 유성오는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공의 측실(側室)에 1남이 있으나 역시 어리다.나와 금양은 형제와 같은 사이로서 실로 오거(伍擧)와 성자(聲子)의 우정주D-003을 느끼고 있는 관계라 하겠다. 그러니 명사(銘詞)의 부탁을 의리상 어떻게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크고도 넓은 도량 / 刜鍾之器민첩한 일솜씨 / 歷塊之駟어떤 일도 훌륭하게 요리하였고 / 用無不利그 충직 그 성실 / 惟忠惟勤온갖 고난 극복하며 / 協濟艱屯중흥의 신하 되었도다 / 中興藎臣약관의 벼슬길 일찍도 현달(顯達)하였는데 / 弱通壯顯한창 일할 나이 불운을 맞았나니 / 未衰而蹇영고 성쇠 몇 차례나 바뀌었던가 / 枯苑婁嬗옥의 티 어디서 찾을 수 있으리요 / 曷其玷而게다가 벌써 갈고 또 닦았는걸 / 矧旣磨之연성주D-004엔 원래 흠이 없었더라오 / 連城靡虧괴극주D-005의 공에 대한 공평한 평가 / 槐棘聽平지금도 그 말이 징험되나니 / 言信有徵내가 이 명으로 다시 확인하노라 / 我銘以貞



[주D-001]이척(易戚)을 …… 가운데 :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모두 훌륭하게 상례를 치르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팔일(八佾)에 “상례는 형식적으로 잘하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마음이 가득해야 한다.[喪與其易也寧戚]”고 하였다.
[주D-002]칠신(七臣) : 선조(宣祖)의 유교(遺敎)를 받은 일곱 신하로서, 신흠(申欽)ㆍ박동량(朴東亮)ㆍ서성(徐渻)ㆍ한준겸(韓浚謙)ㆍ유영경(柳永慶)ㆍ한응인(韓應寅)ㆍ허성(許筬)을 말한다. 《燃藜室記述 卷20 廢主光海朝故事本末 朴應犀之獄》
[주D-003]오거(伍擧)와 …… 우정 : 위급한 처지를 서로 구해 주는 친구 관계라는 뜻이다. 오거(伍擧)는 초(楚) 나라 사람으로 오자서(伍子胥)의 조부 초거(椒擧)이고, 성자(聲子)는 채(蔡) 나라 사람으로 이름이 공손귀생(公孫歸生)이다. 오거의 장인 왕자모(王子牟)가 죄를 짓고 나라를 빠져 나갔는데, 오거가 몰래 보내 주었다고 혐의를 두고 치죄하려 하자, 오거가 정(鄭) 나라를 거쳐 진(晉) 나라로 망명할 즈음에 성자와 만나 귀국할 일을 의논하였다. 이에 성자가 초 나라의 영윤(令尹) 자목(子木)을 만나 천언만어의 극진한 말을 해 주며 설득한 결과, 자목이 마침내 왕에게 말해 오거의 작록(爵祿)을 더해 주고 돌아오게 하였다. 《春秋左傳 襄公 26年》
[주D-004]연성 : 연성벽(連城璧)의 준말로, 전국 시대 때 진(秦) 나라 소왕(昭王)이 15성(城)과 바꾸자고 청했던 조(趙) 나라 소장의 화씨벽(和氏璧)을 말한다.
[주D-005]괴극 : 삼괴구극(三槐九棘)의 준말로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을 뜻하는데, 백사 이항복과 현헌 신흠이 박동량의 억울함을 변호해 준 것을 가리킨다.
세적편에 올려저 있는 것은 청음 휘 김상현 찬 신도비 이고 위편은 4대 문장가인 계곡 장유 묘지명임 오창공 묘갈명은 더
있는것 같음 번역원 번역본 올리니 직계 후손 들은 참고 하시기 바람    
깨진 원문은 천안 창서 족숙 찬승 번역 문에 참조 요함 인천서 찬승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아랫글 : 남곽공 신도비2009.06.1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