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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공신과 원종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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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한가람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7-07 08:47 조회3,956회 댓글0건

본문

임진왜란 공신과 원종공신

우리의 반남박씨 선조에는 정 공신 5분과 많은 분의 원종공신이 계신데
정 공신은 확실하게 밝혀져 있으나
원종공신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고 각 종파에서 파악된 몇분만 알려져 있다.
조선조에서 28회의 공신이 있었으며 그에 따르는 원종공신도 있게 마련이고
그 외에 중요한 일이 있을때마다 원종공신의 훈을 준것이 있는데 그에대한 기록이 별로없다.

그 중 임진왜란과 관계된 2회의 공신이 있었고
첫 번째 선조의 파천을 수행한 86분의     호성공신
두 번재 임진왜란의 삼대첩의 주역 18분의 선무공신

우리문중에는 호성공신에 오창공(휘 박동량) 께서 호성공신 2등공신에 훈을 받았고
호성공신과 선무공신때 원종공신의 훈작을 받은 분의 기록을 찾게 되어 이를 밝히고자 합니다

임진왜란 공신, 임진왜란원종공신

    호성 2등 공신
오창공 휘 동량(1569-1635)    소-응복-동량-미

    호성 원종 일등 공신
금양위 휘  미(1592-1645)       소-응복-동량-미
졸헌공 휘 응복(1530-1598)     소-응복         ( 증영의정 補祚공신 潘川府院君 )
도정공 휘 인(1532-1606)        소-응인
시정공 휘 동언(1553-1605)     소-응순-동언
副率공 휘 동윤(1561-1593)     소-응복-동윤     ( 추록호성원종공신)
서포공 휘 동선(1562-1640)     소-응천-동선
            
     호성 원종 삼등 공신
교리공 휘  의(1600-1644)       소-응복-동량-의-세채
남곽공 휘 동렬(1564-1622)     소-응복-동렬
길주공 휘 동망(1566-1615)     소-응복-동망
첨추공 휘  호(1586-1667)       소-응복-동렬-호
첨정공 휘  린(1594-1665)       소-응복-동망-린        
나헌공 휘  황(1597-1648)       소-응순-동언-황
학생공 휘 동휴(                      소-응남-동휴

     선무 원종 일등 공신
금양위 휘  미(1592-1645)      소-응복-동량-미
오창공 휘 동량(1569-1635)    소-응복-동량
서포공 휘 동선(1562-1640)    소-응천-동선

    선무 원종 이등 공신            
길주공 휘 동망(1566-1615)     소-응복
좌랑공 휘  원(1566-1597)       소-응남-동도-원 (남일공 휘 박응남 의 손자 관 병조좌랑)
                                        
    선무 원종 삼등 공신
할당공 휘 동현(1544-1594)     소-응천-동현
약창공 휘  엽(1570-1623)       소-응천-동호-엽
           휘 사룡     葵-秉鈞--琛 - 承張-聃壽-士龍 (13世)
        

박응복(朴應福)     1530(중종 25)~1598(선조 3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경중(慶仲), 호는 졸헌(拙軒). 사간(司諫) 소(紹)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사부(士俯)의 딸이다.
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7세부터 유조순(柳祖詢)성제원(成悌元)이중호(李仲虎) 등에게서 배웠다.
1549년(명종 4)사마시에 합격,
1564년에 식년문과 을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저작 춘추관 봉교전적 감찰; 예조좌랑병조좌랑 정언 지평 헌납 장령 집의 성균관사예 성균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동서분당이 되어 당쟁이 일기 시작하자 한때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힐 생각도 하였으나,
1577년(선조 10)다시 관계에 나와 집의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 공조참의 호조참의를 거치고, 병조참의로 있을 때 당시 병조판서 이이(李珥)를 배척하는 상소가 받아들여지고 지지하는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보고 사직하였다.
1589년 병조참판에 제수되어 대사헌,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同知義禁)을 거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참판 겸 부총관으로서 왕을 호종하였고,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서 대사간공조참판을 지냈다.
1593년 왕을 호종하고 환도하던 중 해주에 이르러 병으로 인하여 뒤에 떨어졌다가,
1595년 왕비를 호종하여 환도한 뒤 형조참판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왕비를 호종하고 수안(遂安)까지 가서 이듬해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묘지는 양주 금촌(金村)에 있다.

박동현 1544(중종 39)~1594(선조 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학기(學起), 호는 활당(活塘). 사간 소(紹)의 손자로, 사재감정(司宰監正) 응천(應川)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희려(金希呂)의 딸이다.
타고난 천품이 특이하고 행실이 매우 발랐으며, 집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독실하였기 때문에 향리에서 모두 감탄하였다.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참봉으로 벼슬길에 나가기 시작하였으며, 그뒤 의금부도사 宗簿寺直長石 城縣監등을 지냈다.
1588년(선조 21)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正言 지제교(知製敎)수찬(修撰)이조정랑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591년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 등이 일본의 국서를 가지고 왔는데 그 중에는 일본이 중국을 정벌하겠으니 조선에서 길을 빌려 달라는 내용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중국에 알리느냐 마느냐로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이때 수찬으로 경연(經筵)에 입시하였던 그가 중국과 우리나라의 국교관계를 생각하여 알리는 것이 옳다고 건의하여 분분하던 논의가 알리는 쪽으로 결정이 나게 하였다.
또, 경연에서 여러 번 언로를 넓힐 것을 주청하여 경연은 물론, 그동안 폐지되어왔던 상참(常參)윤대(輪對)소대(召對) 등의 군신간의 모임을 자주 열게 하니, 임금과 신하간의 대화가 잘 통하여 조정의 일이 잘 풀려나갔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왕과 정부 일행이 의주까지 피난하는 중에도 시종 이 일행을 수행하면서, 온갖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문란한 규율을 바로잡고 시의(時宜)에 맞는 (進言)을 하여 모든 일을 바로잡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1593년 환도 후에도 계속 교리;헌납지평사간응교 등의 요직에 있으면서 국정을 바로잡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을 사사하여 자주 찾아가 배우고, 김장생(金長生)과 친교가 두터웠다.

박동선
1562(명종 17)~1640(인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수(子粹), 호는 서포(西浦). 사간 소(紹)의 손자로, 사재감정(司宰監正) 응천(應川)의 아들이며, 금주군(錦州君) 정(炡)의 아버지이다.
1589년(선조 22)28세에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1590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병조좌랑이 되었다.
그뒤 남포현감으로 (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는데, 논공행상에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있어 제외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현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켰다.
그뒤 성균관전적직강예조좌랑병조좌랑사복시정 등을 차례로 지내고, 경기도사수안군수에 이어 인천부평남양 등의 부사를 지냈는데 가는 곳마다 치적이 있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그를 대사간에 임명하자 그의 패륜행위를 못마땅히 생각하여 사양하였으나 참의로 임명되었다. 이어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613년(광해군 5)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 반대하고 시골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인조반정으로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병조참의로서 인조를 모시고 공주로 피난갔다가 난이 평정된 뒤 돌아와 가선대부로 대사헌이 되었고, 이조참판을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모시고 강화로 갔으며, 형조판서좌참찬우참찬지돈녕부사지중추부사 겸 지경연사지의금부사춘추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늙고 병든 몸으로 왕손을 호종하고 강화교동
호서 등지로 피난하였다가 난이 끝난 뒤 한성에 돌아와 좌참찬이 되었다.
저서에 《서포기문 西浦記聞》이 있다. 시호는 정헌(貞憲)이다.

朴東望 1566(명종 21)~1615(광해군 7) 소--응복--동망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진(子眞). 대사헌 응복(應福)의 아들이다.
유조인(柳祖認)의 문인이며, 1594년(선조 27)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대교봉교 등을 역임하고 지평이 되었다.
이어 평산부사 신천군수강화부사 등을 지내고, 成均館直講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의 추천으로 당상관에 오르고, 길주목사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뒤에 영흥부사로 전임하였다.
1615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던 중 안주(安州)의 공관(公館)에서 죽었다.

박동량 (1569 선조13) ~1635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룡(子龍), 호는 기재(寄齋)오창(梧窓)봉주(鳳洲). 대사헌 응복(應福)의 아들이다.
1589년(선조 22)진사시에 합격,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되어 검열, 호조병조의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 유조인의 문인(박동망.박동량)
1592년 임진왜란 때 병조좌랑으로 왕을 의주로 호종(扈從)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의주에 주재하는 동안 왕이 중국의 관원이나 장수들을 만날 때는 반드시 곁에 있게 하여 대중외교(對中外交)에 이바지하였으며, 왕의 신임도 두터웠다.
이듬해 동부승지좌승지를 거쳐 다시 도승지에까지 이르렀다.
1596년 이조참판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정유재란 때는 왕비와 후궁 일행을 호위하여 황해도 수안(遂安)에 진주, 민폐를 제거하고 주민들의 생활을 살폈다. 이어 연안부사경기도관찰사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면서도 전란 뒤의 민생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2등으로 금계군(錦溪君)에 책봉되고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수릉관(守陵官)으로 3년간 수묘(守墓)하고, 1611년(광해군 3)판의금부사가 되었다.
그런데 일찍이 선조 때부터 한응인(韓應寅)유영경(柳永慶)서성(徐성06)신흠(申欽)허성(許筬)한준겸(韓浚謙)과 함께 영창대군을 잘 보호하라는 부탁을 받은 이른바 유교7신의 한 사람으로 대북파(大北派)의 질시 대상이 되었다.
1612년 김직재무옥사건(金直哉誣獄事件)이 일어나자 추관(推官)으로 있던 그가 무고임을 알고 연루자들을 용서하려 하다가 더욱 미움을 받아, 그뒤 자주 탄핵을 당하여 문외출송(門外黜送)당하였다.
곧 풀려나와 복관되었으나 이듬해 계축옥사 때 모반혐의로 심문을 받다가 혐의가 희박하여 극형은 받지 않았는데, 이때 반역관계는 극구부인하면서 선조가 죽을 당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사주로 궁녀들이 유릉(裕陵:懿仁王后의 능)에 저주한 사실은 시인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계축옥사 때 유릉저주사건이 무고임을 알면서도 시인해서 인목대비로 하여금 유폐생활의 곤욕을 치르게 한 죄로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4년 뒤 충원으로 옮겨지고, 1632년(인조 10)전리에 방귀되었다.
뒤에 아들 미(미27)와 의(의16)의 상언(上言)으로 복관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상용(金尙容) 김상헌(尙憲)형제와 친교가 두터웠다.
저서로는 《기재사초》《기재잡기 寄齋雜記》《방일유고 放逸遺稿》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박원(朴垣) (1566--1597) 紹--응남--동도
(원색세계백과사전-학원사- 1973판)
선조 때 문신
字,    士閑
大司憲 應男의 孫子( 溫陽郡守 朴東燾의 아들)
선조(宣祖)27년(1594년), 정시(庭試) 병과8(丙科8)
    병조/좌랑(兵曹/佐郞), 한림(翰林)에 이름

(문과방목 중에서)
선조(宣祖)27년(1594년), 정시(庭試) 병과8(丙科8)
생년(生年) 1566년, 병인
자(字)     사한(士閑)
본관(本貫) 반남(潘南)
부(父)     박동도(朴東燾)    
조부(祖父)     박응남(朴應男)
증조부(曾祖父) 박소(朴紹)
관직(官職)     병조/좌랑(兵曹/佐郞), 한림(翰林)


朴燁 1570(선조 3)~1623(인조 1). 葯窓公.     紹--應川--東豪--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숙야(叔夜), 호는 약창(葯窓). 아버지는 참봉(參奉) 동호(東豪)의 아들이다.
1597년(선조 30)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01년 정언(正言)이 되고, 이어 병조정랑 직강(直講)을 역임하고 해남현감 등을 지냈다.
그뒤 광해군 때 함경도병마절도사가 되어 광해군의 뜻에 따라 성지(城池)를 수축하여 북변의 방비를 공고히 하였고,
황해도병마절도사를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6년 동안에 규율을 확립하고 여진족의 동정을 잘 살펴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므로 외침을 당하지 않았다.
당시의 권신 이이첨(李爾瞻)을 모욕하고도 무사하리만큼 명망이 있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 뒤 광해군 아래에서 심하(深河)의 역(役)에 협력하고,
부인이 세자빈의 인척이었다는 이유로 그를 두려워하는 훈신들에 의하여 학정의 죄로 평양 임지에서 처형되었다.

壞汝萬里長城
원래스스로 만리장성을 허물어 버린다는 뜻이다 <송서>..
<단도제전(檀道濟傳>에 나오는 말인데. 송나라와 위나라가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송나라의 중신인 단도제
의 위세가 너무도 당당하여 아무도 그를 넘보지 못하였다. 권신과 왕족들이 이를 시기하여 왕명이라 사칭하고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죽이려 할때 그는 머리에 쓰고 있던 건을 내동댕이치며 “너의 만리장성을 스스로 허문단 말이냐(壞汝萬里長城) !” 하고 외쳤다. 과연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위나라 사람들은 “이제 두려운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하며 계속 남쪽을 침범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국경을 철통같이 지키던 평안감사 박엽을 인조가 죽였을 때 “괴여만리장성”이라고 통탄한 사람이 있었다. 과연 박엽이 있는 동안은 감히 압록강을 건너오지 못하던 청나라가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자주 압록강을 넘어왓고, 마침내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는 청나라의 용골대 앞에 무릅을 꿇는 치욕을 당해애만 했다. 이때 용골대가 “이제 박엽을 죽인 것이 후회되겠지?” 하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미() 1592(선조 25)~1645(인조23).
14세 휘 박미(朴미)     汾西公                         紹- 應福--東亮-미
1592(선조 25)~1645(인조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연(仲淵), 호는 분서(汾西). 참찬 동량(東亮)의 아들이며, 선조의 부마이다.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으로,
1603년(선조 36)선조의 다섯째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인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하여졌다.
1605년 친공신적장자(親功臣嫡長子)의 자격으로 2계(二階)를 초자(超資)받아 숭덕대부(崇德大夫)에 올랐으나,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13년(광해군 5)폐모의 논의가 일어났을 때, 아버지가 국구인 김제남(金悌男)과 친교가 깊다 하여 화를 입었다. 자신도 폐모론의 정청(政廳)에 불참하였다 하여 김류(金유15) 등과 함께 10사(十邪)로 불리면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인조반정 후
1625년(인조 3) 회맹공신(會盟功臣)책봉 때 구공신적장자(舊功臣嫡長子)로 가자(加資)되었으며, 혜민서제조(惠民署提調) 에 서용되었다.
1638년 동지 겸 성절사(冬至兼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금양군(錦陽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어려서부터 문예에 능하였고, 특히 서도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서법은 중국의 오흥(吳興)을 따랐는데, 지금까지 참판 박이서비(朴이敍碑), 영흥부사 이수준갈(李壽俊碣) 등의 유필이 남아 있다.
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과 교유하였다. 조카 세채世采가 행장을 짓고, 송시열(宋時烈)이 비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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