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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완성본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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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6-26 07:29 조회7,6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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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경기도 안산의 성호기념관 수장고에서 찾아낸《열하일기》저본. 연암 박지원의 둘째아들 박종채가 편집한 것으로, 붉은 글씨로‘宗侃謹按(종간이 삼가 살피건대)’이라는 주석이 적혀 있다. 종간은 박 종채의 원래 이름이다./양승민 교수 제공


연암 '열하일기' 완성본 찾았다



박지원 아들 박종채가 초고본 수정·보완한 것
조선후기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대표작인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본(底本)이 발견됐다.

양승민 선문대 연구교수(고전문학)는 최근 경기도 안산의 성호기념관에 소장된 자료 중에서 연암의 둘째 아들 박종채(朴宗采·1780~1835)가 아버지 사후에 《열하일기》 초고본을 수정·보완해 편집한 새 필사본(筆寫本·활자로 찍지 않고 손으로 베낀 것)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양 교수는 이 필사본이 현재 전하는 열하일기 필사본 10여 종의 정본(正本)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연을 축하하기 위해 1780년 그의 피서지인 열하(熱河·현재 중국 허베이성 청더·河北省 承德)를 다녀온 것을 기록한 여행기이다. 하지만 명확한 정본(正本)이나 판본(版本) 없이 여러 전사본(轉寫本)으로 퍼졌기 때문에 이본(異本)에 따라 편제 차이가 매우 커서 학계가 풀어야 할 과제였다.



현재 충남대학교 도서관에 연암이 직접 편집한 《열하일기》 수택본(手澤本)이 있지만 정리가 덜 돼 있고 다른 《열하일기》들에 포함된 내용이 많이 빠져 있어서 정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0여 종의 필사본 중에서는 연암 박지원의 집안에서 필사됐다는 뜻인 '연암산방(燕岩山房)'이라고 적혀 있는 전남대 소장본이 가장 인정받고 있는데, 이번에 발견된 박종채 필사본은 이보다 더 많은 수정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새 필사본은 모두 12책 26권(614장)으로 구성됐으며 가로 16.5㎝, 세로 23.8㎝ 크기의 각 책 표지에 '열하일기(熱河日記)'라는 표제가 적혀 있다. 필체가 여럿이지만 모두 반듯한 해서체로 썼고, 여러 번 수정한 흔적이 있어 공동 작업한 교정용 대본으로 추정된다. 매 장 아랫부분에 역시 '연암산방'이라고 선명하게 기록돼 있다. 양 교수는 "이 필사본을 통해 열하일기가 실록 편찬처럼 여러 번에 걸쳐 수정돼 정본으로 완성돼 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새 필사본은 연암이 직접 묶은 초고본을 토대로 박종채가 집안 곳곳에 흩어져 있던 아버지의 방대한 원고를 보완해 새로 목차를 정리하고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완성한 것으로, 《열하일기》의 완성 과정을 둘러싼 의문들을 밝혀줄 것으로 기대된다. 양승민 교수는 27일 성균관대 퇴계인문관에서 열리는 '제250차 한국고전문학회 학술회의'에서 이 같은 내용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 자료를 검토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는 "《열하일기》를 현재 모습으로 만들어 놓은 첫 완성본이자 평생 아버지의 저작을 정리하는 데 열정을 쏟은 박종채가 편집해서 자료적 신빙성도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임진강 철교를 지나 한적한 널문리를 돌아 조금 올라가면 널문리 다리가 나오는데, 사천(沙川) 위에 놓인 볼품없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인상적이다. 취적교(吹笛橋)라는 낭만적인 이름의 다리를 다시 하나 건너면 오른쪽으로 다섯 봉우리가 솟은 오관산이 보인다. 왼쪽으로는 철쭉꽃으로 유명한 진봉산이 있고 그 사이를 지나면 인삼 향이 물씬 풍기는 고도 동개성(東開城)으로 불리는 청교역에 이른다.
         예부터 개성상인들이 장삿길 떠날 때 이곳에서 가족과 기약 없는 이별에 울고, 돌아올 때 이곳에서 아낙과 다시 만나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이산과 상봉의 현장이다. 그래서 이곳을 옛 사람들은 눈물들(淚原)이라고 불렀다. 아득한 고려 때부터 약초가 자라고 소쩍새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던 평화의 마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아온 우리 겨레의 삶터, 이제 널문리 콩밭은 전세계에 노출된 분단의 전시장이 되어버렸다
개성에서 동대문을 지나 삼댐자리(덕암자리)를 건너가면 밋밋한 고개가 나선다.                    
이고개를 황토 고개라고 부른다
이 황토고개 약간 북쪽 후미진 곳에 우리 나라 실학사상가의 대가인 연암 박지원의 묘가 있다. 지난날 이 묘는 상당히 컸는데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박지원은 1737년 3월5일 서울 안국방에 사는 량반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의 가문은 ‘관문대록’으로 더욱이 당시 집권 당파인 서인 노론에 속하는 집안임으로 그에게는 출세의 길이 활짝 열려 있었으나 연암은 일찍부터 과거를 보지 않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는 열여덟 살때부터 창작활동에 열중하였다.
        박지원은 서른세 살 때 장풍군(당시는 금천군) 연암협에 와서 농사를 지으면서 창작에 몰두하였다.
마흔네 살 때 6촌형인 박명원이 청나라 사신으로 갈 때 그의 수행원으로 열하에 갔다왔다. 그는 청나라에 갔다와서(열하일기)라는 작품집을 집필 하였다. 여기에는 실로 방대한 작품과 정론이 실려 있다.
        연암은 마흔아홉 살에 비로소 벼슬길에 올랐다가 말년에는 벼슬을 내놓고 서울 집에서 저술사업에 저술사업에 몰두하다. 1805년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박연암은 자기 묘에 비석도 세우지 말며 아무런 치장도 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러서 그런지 박연암의 무덤에는 상돌 하나 놓이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그 묘가 누구의 묘인지 모르면서도 ‘대감묘’라 부르면서 봄 가을 정성껏 성묘를 했고 또 자기집에 환자가 생겨도 이 묘에 와서 병이 낫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1955년 12월 김일성 주석은 < 사상사업에서 교도주의와 형식주의를 극보하고 주체를 세울 데 > 라는 연설에
서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전통을 잘 알고 그것을 계승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전쟁시기 자신이 어느 인민군 휴양소에 가보니 풍경화를 걸었는데 시베리아의 눈 덮인 곳에 백곰의 그림이었다고 하면서 우리 나라 금강산, 묘향산 등 경치 좋은 곳이 많은데 그런 풍경화는 걸어 놓았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학굔들에 가보니 뿌쉬낀 아니 마임증스끼 같은 외국 사람의 초상화는 걸려 있는데 연암 박지원이나 다산 정약용 등 우리나라의 유명한 사람들의 초상화는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 연설이 있은 후 연암 박지원에 대한 소개 선전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당시 박산운 시인이 박지원은 자기의 선조인데 어려서 부모를 따라 개성에 와서 박연암의 묘을 찾은 적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 근처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이리하여 문예총 중앙위원회에서는 박연암 묘를 확인하는 사업을 하였다.
     황토고에 와서 박연암의 묘라고 인정되는 묘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이 마을 노인들에게 묘주가 누구인가 물었더니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다만 전해오는 말이 ‘서울대감의 묘’라는 것 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묘에는 반드시 지석이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봉분을 파보니 아니나다를까 거기에는 상당히 큰 지석이 있었는데 뚜렷이 ‘박지원묘’ 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리하여 박지원의 묘를 확인했다
. 그 후 문예총에서는 묘를 왕릉 못지 않은 호화무덤으로 꾸리였다 봉상도 더 우람차게 만들고 묘 둘래에 화강석 판석으로 병풍석도 들렀고 두껍고 큰 상돌도 놓고 비석을 괴임석 위에 상당히 크게 세웠다. 또한 묘 가까이에 아담한 정자도 지어놓았다.
그후 이곳으로는 각급 학교의 학생들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박연암 묘지는 하나의 새로운 유원지로 되어 휴식일이나 명절날에 이곳에 놀러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품위 있게 개건된 박연암의 묘는 1960년대 말부터 차츰 버림을 받게 되었다.
당시 당중앙위원회의 지도적 지위에 있던 박금철 김도만 등이 주체를 세운다고 하면서 복고주의적으로 나갔다. 이들은 다산의(목심심서)를 간부들의 필독문헌으로 정하고 의무적으로 읽으라고 지시했다. 주체를 세우며 민족성을 살린다 하면서 결혼식도 옛날식으로 남자들은 사모관대로 차려입고 여자들은 큰머리에 쪽도리 쓰고 활옷을 입혔다. 그리고 신랑은 말을타고 신부는 가마를 타게 하였다.
     이렇게 복고주의적 경향이 심해지자 김일성 주석은 이를 비판하면서 민족유산을 계승발전 시킴에 있어서 복고주의를 경계하며 시대 정신에 걸맞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복고주의의 반대, 봉건유교사상 반대라는 구호를 들고 또 좌경으로 나갔다. 이바람에 연암의 묘는 차츰 냉대를 받게 되었으며 여기에 배치 되었던 관리선 편레도 없애버렸다.
     이렇게 되자 복고주의 반대 광신자들은 묘를 개건하면서 잘 다듬어 썼던 석재를 떼어가기 시작했는데 심지어 병풍석도 떼어가고 상돌도 갈라갔다. 비석도 나뒹굴고, 아담하게 지었던 정자의 마루바닥도 뜯어가고 심지어 기와 까지 벗겨가서 정자는 볼품없이 되었다가 그 후 기둥도 돌보지 않아 다 없어졌다.
     이렇게 되어 호화무덤으로 꾸며진지 10 여 년 만에 묘는 황페화되었다. 차라리 개건하기 전의 소박한 금잔디로 덮여 있던 아담하던 무덤 모습마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복고주의 반대 봉건유교사상 반대 바람에 나라의 귀중한 문화재가 파괴되고 없어졌다.


연암의 묘는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1950년대에 북한 당국에 의해 왕릉 못지 않은 호화 무덤으로 改建되었으나, 복고주의 반대 운동이 일어난 1960년대 말부터 차츰 냉대받으면서 황폐화되어, “차라리 개건하기 전의 소박한 금잔디로 덮여 있던 아담하던 무덤 모습마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하내용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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