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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문동 이야기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의 충신 72명은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면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성계는 불을 질렀다. 그러나 아무도 나오지 않고 모두 타죽고 말았다. (또는 딱 한사람만 나왔는데 그가 바로 훗날 조선 최고의 재상(宰相)이 된 황희(黃喜)였다).”
새로 건국한 조선 왕조에 출사하기를 거부한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의리와 충성의 표상이 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문을 닫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음)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다고 믿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러한 이야기, 또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인터넷을 떠돌아다니고 있으며, 심지어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같은 권위 있는 책에서 조차 그런 이야기가 사실인 것처럼 적혀 있으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먼저 한 가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두문불출”이라는 말은 결코 두문동72현 때문에 생긴 말이 아니다. “두문불출”은 이미 기원전 90년에 완성된 사마천의 <사기(史記)> ‘상군열전’에도 나오고, 644년 당 태종 때 편찬된 역사책 <진서(晉書)>에도 나온다. 더구나 ‘문을 닫다’는 뜻인 “두문”은 <주서(周書)>, <위서(魏書)>, <한서(漢書)> 등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어 “두문” 또는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두문동72현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낭설일 뿐이다(<한한대사전>에서 확인함).
그렇다면 도대체 “두문동72현”은 무엇이란 말인가? “두문동72현”이란 말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영조 27년(1751)이었다(박은봉,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그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영조 16년(1740) 영조가 송도(개성)에 능행 중일 때 폐허가 된 옛 고려의 궁궐터를 돌아본 뒤 후릉으로 향하던 영조가 문득 주위의 신하들에게 물었다.
“부조현(不朝峴)이 어딘가? 또한 무슨 뜻인가?”
주서 이회원(李會元)이 답했다.
“태종께서 과거를 설행하셨는데, 본도의 대족(大族) 50여 가(家)가 과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두문불출했으므로 그 동리를 두문동이라고 했습니다(且杜門不出 故又以杜門名其洞).” (<영조실록>, 영조 16년 9월 1일 기사).
다시 말해서 두문동에서 두문불출이 생긴 것이 아니라, 두문불출에서 두문동이라는 동리 이름이 생긴 것이다(즉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반대임).
그런데 당시에 자신을 위해 일편단심 충성을 바칠 신하가 절실히 필요했던 영조는 교자를 멈추게 하고 감탄하면서 직접 ‘不朝峴’이라는 글자를 써주며 비석을 세워 기념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물론 아무런 역사적 기록도 고증도 없었다. 결국 영조의 어명 한 마디로 전설 같은 이야기가 그만 “확고한 사실”이 되어 버렸고 두문동 사람들은 만고의 충신이 되었다. 고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지 약 350년이 지난 뒤에 생겨난 일이었다.
그 후로도 영조는 두문동 인물들을 추켜세웠다. 두문동 “충신”들에게 제사도 지내주고 비석을 세워 기념했으며 두문동 후손들을 등용하기도 했다. 두문동72현은 원래 72명이 아니었다. 영조 당시 확인된 두문동 인물은 임선미(林先味)와 조의생(曹義生) 2명 뿐이었다. 정조 때 와서 개성 숭절사에 배향된 인물도 임선미, 조의생, 그리고 맹(孟)씨 성을 가진 이름 모르는 사람 등 단 3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더니 두문동 “충신”의 수는 자꾸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라가 충의, 절의를 기리고 장려하려는 정책(포충장절책 褒忠奬節策)에 편승하여 많은 가문들이 실기, 전기, 문집, 족보 등을 조작하여 선대 조상들을 두문동에 연결하였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72명일까? 그것은 바로 공자의 문묘에 배향된 제자 72현을 모방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72명의 명단이 등장한 것은 19세기 후반인데 이상한 것은 자료마다 명단이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두문동72현록”이라는 명단에는 정몽주가 들어있으나 “고려두문동72현인”이라는 명단에는 정몽주가 없다. “두문동72현록”은 1872년 여주이씨 집안에서 발간한 이행(李行)의 문집<기우집(騎牛集)>에 있고, “고려두문동72현인”은 일제시대인 1924년에 발간된 <전고대방(典故大方>에 수록되어 있다. <전고대방>에 수록된 “고려두문동72현인”은 1860년 평산신씨 신현(申賢) 집안에서 발간한 문집 <화해사전<華海師典)>의 “언지록(言志錄)”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박은봉 , <전게서>).
그러나 족보학의 대가인 고(故) 이수건 교수의 저서 <한국의 성씨와 족보>에 의하면, 18세기 이래 쏟아져 나온 여러 성씨들의 족보를 비롯하여 <차원부설원기>(차문절공유사), <화해사전>, <화동인물총기>, <경학대장>, <두문동실기>, <화왕입성동고록>, <김주전기> 등의 기록들은 그 내용을 믿기 어려운 것들이다. 따라서 <화해사전>을 근거로 한 <전고대방>의 “고려두문동72현인” 명단은 의심스러운 것이며, <기우집>의 “두문동72현록” 역시 객관적으로 고증할 만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다.
또한 황희가 죽은 지 430여년 뒤인 고종 27년(1890)에 발간된 <방촌선생청무실사> 서문에 황희가 두문동 인물들의 “대표”가 되어 조선에 출사한 것처럼 기술되어 있으나 이는 별로 믿을 만한 내용이 아니라고 한다(박은봉, <전게서>). 황희를 굳이 두문동 출신으로 만들어야 했던 후손들의 의도를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지만, 설사 그가 두문동 출신이 아니라 하더라도 결코 그의 명성과 업적이 격하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땅의 여러 가문에서 그 조상들을 고려의 “충신”으로, 또는 두문동72현에 연결시키거나, 조선 초기의 단종 복위 사건과 더불어 사육신, 생육신에 연결시키기 위해 조상 세계를 조작하고 족보의 기록을 변개(變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음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이수건, <한국의 성씨와 족보>). 이러한 조작 행위는 비단 족보에만 머무르지 않고 각종 문집, 전기, 묘지, 묘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소설, 연극, 영화, TV드라마, 그리고 일부 “국문학자”, 심지어는 자칭 “사학자"라는 일부 인사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또는 단순 실수로 인해 역사 왜곡은 현재 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구별하기가 심히 어렵다).
조상들이 해 놓은 일이라고 해서 무조건 진실이라고 고집하거나, 잘못인 줄 뻔히 알면서도 조상들이 해 놓은 일이니 고칠 수 없다고 버티는 태도는 분명 경계해야 할 일일 것이다. 새로 편찬되는 족보(세보)에는 “의도적인 오류”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편찬(편집)위원님들의 어깨가 무거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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