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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평위 박필성이 쓴 '숙빈최시 신도비명'중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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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한가람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5-04 02:08 조회6,275회 댓글0건

본문


"일찍이 임금의 은총 입어 /
순종으로써 공경히 모셨네 /
마음에 성실함 온축하시니 /
궁궐 법도에 부합했네 /
이내 상서로운 복 품으시어 /
우리 성궁(聖躬) 낳으셨네 /
대왕이 될 점괘에 부합하니 /
하늘이 우리나라 도우셨네"

영조가 즉위하던 해인 1725년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지어 비석에 새기게 한 '숙빈최씨 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17세 휘 박필성(朴弼成)    1652(효종 3)~1747(영조 23).     응복--동열--호--세모--태장--필성
자는 사홍(士弘), 호는 설송재(雪松齋).효종의 사위이며, 도정(都正)을 지낸 태장(泰長)의 아들이다.
1662년(현종 3) 효종의 딸 숙녕옹주(淑寧翁主)와 결혼하여 금평위(錦平尉)에 봉해졌으나, 1668년에 숙녕옹주는 두환(痘患)으로 죽었다
숙종 때에는 1685년부터 1717년까지 네 차례나 사은사 또는 주청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영조 때에는 그의 장수(長壽)를 치하하여
1738년(영조 14)에 시(詩)를 내리고,
1741년에는 오언시와 궤장(궤杖)을 내렸으며,
1746년에는 그를 우대하여 영릉도위(寧陵都尉)에 봉했다.
1747년 7월 97세의 나이로 죽자 8월에 효행을 치하해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현종3 8/04    박필성(朴弼成)을 금평위(錦平尉)로,
현종3 8/04    박필성(朴弼成)을 금평위(錦平尉)로,
             【숙녕 옹주(淑寧翁主)에게 장가들어 직을 제수한 것이다.】
현종7 9/17    숙영 옹주(淑寧翁主)가 죽었다. 선왕(先王)의 후궁 이씨의
             소출로서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의 아내이다.
현종9 5/20    숙녕 옹주가 졸하였다. 옹주는 상의 서매(庶妹)이다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시집갔는데, 두역을 앓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 상이 몹시 애도하여 조시(朝市)를 정지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
         금창위(錦昌尉) 박태정(朴泰定) 등급을 나누어 제급(題給)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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