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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ㆍ국치 앞에 목숨을 끊어 절의를 지킨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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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찬승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4-09 06:44 조회3,6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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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국치 앞에 목숨을 끊어 절의를 지키다 퇴계의 도학(道學)에 이만도의 절의(節義) 1910년, 500년의 조선왕조가 망하여 일본에 합병되자, 의혈(義血)의 조선 선비들이 곳곳에서 목숨을 끊어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참을 수 없는 자신의 분노를 땅 속에 묻어야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세 분을 꼽는다면 경상도 출신의 향산 이만도(響山 李晩燾 : 1842~1910), 전라도 출신의 매천 황현(梅泉 黃玹 : 1855~1910), 충청도 출신의 일완 홍범식(一阮 洪範植 : 1871~1910 : 벽초 홍명희의 부친)이다. 이만도는 69세, 황현은 56세, 홍범식은 40세에 전화나 휴대폰으로 연락할 수도 없을 때, 약속이나 한 듯이 단식으로, 독약으로, 목매달아서 목숨을 끊어 핏빛 의혼을 청사에 길이 휘날리게 했다. 매섭고 무서운 선비들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자신이 끊는다는 ‘자결’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살고 싶은 마음이야 인간의 본능이고,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싫은 일이던가. 그래도 그들은 인간의 보통 마음을 뛰어넘어 나라를 빼앗겨 망했다는 분노와 울분 때문에, 사람이라면 모두가 넘기 어려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위대하고 성스러운 독한 마음을 실천으로 옮기고 말았다. 장하고 대단하며 무서운 일이다. 황현은 미미한 가문의 출신으로 뛰어난 시재(詩才)와 문장으로 겨우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에 그치고 벼슬에도 오르지 못한 전라도 구례의 꼿꼿한 선비였지만, 이만도와 홍범식은 명문대가의 후예로 그야말로 기득권층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풍산홍씨로 벌열의 집안에서 태어난 홍범식은 충청도 괴산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도 음직(蔭職)으로 금산군수(錦山郡守)로 재직하다가 합병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 이만도는 경상도 안동 출신으로 세상에서 유명한 퇴계 이황의 11세 후손이었다. 대대로 학문과 벼슬로 이름이 높았지만, 할아버지·아버지와 함께 3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천하에 이름을 날린 기득권층인 데다 자신은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더욱 혁혁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이들이 모든 명예와 기득권을 통째로 버리고 그렇게 무섭고 두려운 죽음을 스스로 택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만도가 세상을 떠나자 호남 장성의 대학자이자 한말의 의병장이던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 : 1846~1916)은 이만도의 ‘묘갈명’(墓碣銘)에서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 “우리 조선이 한창 융성하자 퇴계 선생께서 도학(道學)으로써 한 차례 문명(文明)의 운세를 열어 다스려지게 하더니, 국가가 망하자 향산 선생이 절의(節義)로써 만세토록 내려오는 강상(綱常)의 중요함을 붙드셨다. 대체로 도학과 절의는 다른 길이면서도 하나로 모아지고, 일이야 다르지만 공로는 한 가지여서 하늘과 땅 사이에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고 썼다. 조선왕조는 유교국가였다. 유교의 가장 큰 덕목은 도학과 절의이다. 퇴계는 성리학이라는 도학으로 조선왕조 철학의 근간을 세워 나라 융성의 기틀을 세웠고 향산은 유교의 다른 덕목의 하나인 절의를 몸으로 실천하여 조선의 혼을 천하에 떨쳤으니 역사적 임무를 그 집안에서 완성했다는 평가를 내린 것이다. 이만도의 가계 이만도의 자는 관필(觀必), 호가 향산이다.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퇴계의 직계 후손이니 조선왕조 유학의 최고봉 집안에서 태어났다. 퇴계 가문의 학문이야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대대로 벼슬길도 끊이지 않아 높은 명성을 얻은 집안이니 특권층이자 기득권층 출신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만도의 고조할아버지 이세사(李世師)는 문과에 급제한 학자·관인(官人)이었고, 증조부 이귀서(李龜書)도 학문이 높아 여러 벼슬이 내려졌으나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던 학자였다. 이른바 3대 문과 집안이라고 일컬어지는 가계는 조부 때부터 시작된다. 할아버지 이가순(李家淳)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응교에 이른 문신으로 하계(霞溪)라는 호로 널리 알려진 분이며, 아버지 이휘준(李彙濬)도 호가 복재(復齋)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오른 명망 높은 선비였다. 거기다가 자신이 문과에 장원급제했으니 가문의 융성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그냥 알아볼 수 있다. 퇴계의 혈통을 받고 태어나 시례(詩禮)의 유풍을 흠뻑 적시며 살았던 이만도는 바로 자기 아버지의 뜻 깊은 교훈을 잊지 않고 살았으니 가문의 유풍은 한 인간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25세인 1866년 이만도가 문과에 장원하자, 아버지 복재공은, “선비가 벼슬에 나가면 태평한 시대에야 임금을 도와 백성들에게 혜택을 끼쳐야 하지만,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는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이니 너는 힘쓸지어다”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이런 가문의 가르침은 끝내 그를 역사적 인물에 오르게 했다. 이만도의 가계는 분명히 특권층이었다. 그러한 계층에 속하면서도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초개처럼 목숨까지 버렸다는 점에서 그의 인품과 덕행이 더욱 고결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귀족에게 부하된 높은 의무, 그런 책임감을 뼈저리게 느끼고 그런 책임을 완수했던 점에서 그의 영광된 삶을 예찬하게 된다. 나라가 망하자 높은 신분과 귀한 집안에서는 일본에 아부하고 협력하며 그들에게 동화되는 일에 앞장서는 경우가 많았다. 비록 적은 수효지만,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생명까지 바친 사람이 있었던 것은, 그래도 의리를 숭상하던 유교정신이 길러준 민족혼의 긍정적 측면이었다. 이만도의 후손들이 보여준 독립운동의 혁혁한 역할에서도 그의 가계는 대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벼슬살이 이만도는 25세에 장원급제한 이래, 명문의 후예라야만 가능한 여러 청직(淸職)을 거치며 많은 벼슬을 역임한다. 성균관의 전적(典籍),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명예로운 옥당벼슬인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오른다.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임금에게 곧은 진언(進言)을 하기 시작하자 대신들의 칭찬이 자자했고, 국가의 장래와 미래에 대한 원대한 포부를 밝힐 때에는 모두가 옛날 대신(大臣)의 풍모가 있다는 격려를 받았었다. 옥당에 들어간 이후에는 교리·부교리·장령을 역임했고, 지평·병조좌랑·응교·부응교·사간원 집의·성균관 사성·장악원정 등의 여러 버슬을 두루 역임했다. 그 뒤 고향에서 가까운 양산군(梁山郡)의 군수로 발령 받아 부모님 봉양에 편하도록 조치해주었으니, ‘이양산(李梁山)’이라는 호칭은 그래서 얻게 되었다. 41세이던 1882년에는 통정대부의 위계에 올라 공조참의·동부승지라는 당상관에 제수되었다. 그때는 벌써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던 때로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곧장 고향으로 내려와 책을 읽고 뜻을 구하며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42세 때에도 연달아 동부승지의 제수(除授)가 있었지만 전혀 응하지 않고 본격적인 학문연구와 후학들과의 강학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43세에 비로소 ‘주서절요’(朱書節要)를 읽었다는 연보의 기록으로 보더라도 그 무렵부터 주자학과 성리학 연구에 침잠했음을 알게 된다. 그 무렵 당대의 학자이던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 등과도 학문토론을 시작했고 많은 글을 짓고 학자들과의 교류를 확대하며 수양과 학문 연마에 정열을 바쳤다. 1895년 향산은 54세였다. 이 해는 기울던 나라에 흉측한 참변이 일어났으니 명성황후 민비의 시해사건이 일어났다. 의분을 견디지 못한 향산은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대를 쳐부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다른 도모를 시도하면서 참았으며,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부끄러움을 이기느라 통곡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64세의 1905년에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죽어야 한다는 뜻을 더욱 굳혔다. 나라가 망하던 무렵에 옛 신하들에게 의미 없는 벼슬 위계만 높여서 내렸으니 1907년에는 가선대부, 1909년인 68세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의 위계에 올랐으나 일절 받지도 않았고 사용하지도 않았다. 당상관인 동부승지가 마지막 벼슬이었고, 제대로 행한 벼슬은 양산군수가 마지막이어서 세상에서는 전라도의 홍금산(洪錦山 : 금산군수 홍범식-그때 금산군은 전라도 소속이었음), 경상도의 이양산(양산군수 이만도)을 망국에 절사한 의인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마침내 경술년의 국치(國恥) 향산은 융희 4년인 1910년, 69세의 노인이 되었다. 망국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 있던 그 시절, 마음을 안정하지 못한 그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생활을 했다. 그 전해에 광덕(廣德)으로 이사 가서 살던 향산은 다시 명동(明洞)으로 옮겼으며, 다시 사동(思洞)으로 옮겼다가 또 명동으로, 광덕에서 백동(栢洞)으로 옮겨 살았다. 그해 음력으로 7월25일(양력 8월29일) 나라가 일본에 합방되어 고종황제는 덕수궁왕(德壽宮王)이 되고 융희황제는 창덕궁왕(昌德宮王)으로 강등되어 나라 없는 백성들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깊은 산속 마을에 숨어서 살던 이만도는 음력 8월1일에야 친구들인 유필영(由必永)·권재훈(權載勳) 등이 찾아와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죽는 일 아니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이만도는 부모님 묘소에 올라가 통곡하는 일만 계속했다. 14일 동안 통곡으로 보내다가 음력 8월14일부터 음식을 끊고 부모님 묘소에 올라가 통곡한 뒤, 안동 예안군의 청구리(靑丘里) 율리(栗里) 마을 재종손(再從孫) 이강흠(李綱欽)의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결국 굶어 죽어 조선에 충혼을 천하 알리시고 일본 사람들에게 절의을 알리신분이심니다 동생 휘 이만규도 급제해 벼술도 버리고 일제에 퇘직금도 거절하고 심산 휘 김창숙 선생이 주도하신 파리 평화회의 신간회의 유림대표로 면우 곽종석웅과 서명하시고 채포돼 성산감옥에서 병을 얻어 병사 하셨습니다 관우 조카님 임정 90돌을 맞이 하여 족보 세적편에 올리고자 조사 하다가 퇘계 가문과는 오랜 혼맥(婚脈)관계로 향산 가문과는 우리가 외손이기에 아는데로 소개함니다 조카님 같은분이 종중 있다니 자랑스럽게 생각 하면서 조사한 내용 아는데로 올리게습니다 이육사 휘이원록 자이활 청포도 광야에 시인도 이집안출신임니다 육사는 북경대학 유학 하시고 독립운동 하시다가 일경에 체포돼 이역 만리 차듸찬 북경 감옥에서 옥사 했으며 형 이원기 동생 이원록 등 4형제가 모두 독립투사임니다 하계 원촌 이동내모두가 퇘계 3쩨손자 동암 이영도 후손으로 25명에 독립 유공자를 배출했습니다 온동내 주민모두가 독립 투사인 셈임니다 중국 대륙 광야에서 목놓아 소리치며 닭우는 소리 여명(黎明) 새벽 (해방)도 보지 못하고 육사는 가고없지만은 육사에 그 충혼(忠魂)은 역사에 길이 남아 우리 민족에 가숨에 오래 오래 남아기억 할것임니다 안동에 애국지사 휘김대락 휘김동삼 석주 휘이상룡 눈내리는 엄동 설한에 많은재산 그리고 노비도 모두 해방 시키고 조선에 양반으로 아무부족함이 없는 모든 기득 권도 포기하고 식솔을 데리고 낯설은 중국땅 으로 망명한겄도 모두 영남 유림에 태두 향산에 굶어 죽은 영향 을 밭은겄같습니다 독립유공자 를 조사 하다보니 행방불명된 사람 호적도 없고 족보에도 빠진 사람 (우리 종중 가까운 종친들도 있습니다) 더조사해서 올리도록 노력해보게습니다 조카님도 조사해 아는데로 정보 부탁 들이 겠습니다 인천서 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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