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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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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자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4-04 16:20 조회4,037회 댓글2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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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소군의 초상]
왕소군(王昭君, 기원전 1세기)은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 복주누약제 선우(復株累若鞮單于)의 연지(선우의 처)로, 본래 한나라 원제의 궁녀였다. 이름은 장(嬙, 출전은 한서)이다. 성을 왕, 자를 소군이라고 하여 보통 [왕소군] 이라고 불리며 후일 사마소(司馬昭)의 휘(諱)를 피하여 명비(明妃), 왕명군(王明君) 등으로도 일컬어졌다. 형주 남군(현재의 호북성 사시) 출신으로 양귀비, 서시, 초선과 함께 고대 중국 사대 미인의 한 사람에 손꼽힌다.
  1, 생애
전한의 원제 시대, 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한나라의 여성을 연지로 달라고 해, 왕소군이 선택되어 그의 장남을 낳았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변방의 세력을 달래기 위해 보냈다는 설도 있다.) 이후 호한야 선우가 사망하자, 당시 흉노의 관습대로 아들 복주누약제 선우의 처가 되어 둘째 딸을 낳았다. 한족은 부친의 처첩을 아들이 물려받는 것을 꺼려하여, 이것이 왕소군의 비극으로 민간에 전승되었다. 황량한 초원지대가 대부분이었던 흉노의 땅에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땅을 그리며 느꼈을 왕소군의 감정을 당의 시인 동방규는 "소군원"이라는 시에서 노래한다. 그 시구 중에 "봄은 왔으나 봄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라는 구절은 흉노 땅의 봄을 맞이했음에도 고향 땅의 봄같지 않아 더욱 사무치게 고향이 그립다는 그녀의 애절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지금도 이 시구인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그리움의 인용구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이후 72세가 되던 해에 병을 얻어 돌무덤에 안장되었는데, 사람들은 그 무덤을 일컬어 소군묘(昭君墓) 혹은 청총(靑塚)이라고 부른다.
  2, 출전
《서경잡기》에 따르면, 원제는 흉노에게 보내는 여성으로 후궁 중 가장 추한 여성으로 선택하기 위해 초상화에 그려진 가장 보기 흉한 여성을 선택한 것이다. 초상화를 그리던 장인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던, 왕소군은 가장 보기 흉하게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왕소군이 선택된 것이다. 황제에게 이별을 알리기 위해 마련된 자리에서 원제는 왕소군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빼앗겼지만, 어쩔 수 없이 보내고 말았고 격노한 원제는 화상의 목을 쳤다고 한다. 그 후 호한야 선우가 죽고, 횽노의 관습대로 복주누약제 선우의 처가 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후한 시대의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실렸던 것이, 진나라 때 왕명군사(王明君辭), 원의 마치원의 잡극 한궁추(漢宮秋) 등으로 작품화 되었다.
  3, 관련 작품
왕소군을 다루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당나라 백거이, 왕소군이수(王昭君二首)
• 왕안석의 명비곡(明妃曲)
• 두보의 영회고적(詠懷古蹟:明妃村)
• 조우(曹禺)의 극본 왕소군(王昭君)  ---------
 4, 詩文
 1); 途中寒食(도중한식) (五言唐音)(宋之問) 
    馬上逢寒食 = 말위에서 한식을 맞으니  
    途中屬暮春 = 나그네 가는길에 봄이 저물어 가네
    可憐江浦望 = 아쉬워라 포구에서 바라보니 
    不見洛橋人 = 낙교의 고향사람 보이지 않네,
2);  昭君怨(소군원)『五言唐音』(王昭君 詩)
 漢道  方全盛 이요 - 한나라 서울은 번성하여 있고,    
 朝廷  足武臣 인데 - 조정에는 무장들이 풍족하게 있는데,
 何須  薄命妾 으로 - 어찌하여 박명한 첩으로 하여금,    
 辛苦  事和親 고- 슬프고 개로운 오랑캐와 화친하는 일을 할려고 하는고
 掩淚 辭丹鳳 이요- 눈물을 가리고서 단봉을 하직하니,(丹鳳-한나라궁궐),       含悲  向白龍 이라 - 슬픔을 머금고서 백용구로 나아가니,
 禪于  浪驚喜 하나 - 선우는 놀랍고도 한없이 좋아하지만,    
 無復  舊時容  을  - 다시는 옛시절의 모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일세,
 胡地 에 無花草 하니  - 오랑캐땅에 화초가 없으니   
 春來 에 不似春 이라  - 봄이와도 봄같지 않이하네,
 自然    衣帶緩 하니  - 저절로 옷이 헐렁해 지는데,   
 非是    爲腰身   을  - 이는 몸매를 관리함이 아니랍니다,,
3);  李太白 詩,
◎ 이 당시의 왕소군을 한탄하며 〈중국의 시성 이백(李白)〉은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겼다.
 昭君拂玉鞍(소군불옥안) - 소군이 구슬안장 추어올려 , 上馬涕紅頰(상마체홍협) -  말에 오르니 붉은 뺨에는 눈물이 흐르네 , 今日漢宮人(금일한궁인) - 오늘은 한나라 궁궐의 사람인데, 明朝胡地妾(명조호지첩) - 내일 아침에는 오랑캐 땅의 첩이로구나 ,,,
   4, 기타 이야기,
◎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미인이 흉노 왕과 함께 떠나가자, 원제는 화가 치밀어 올라 왕소군의 초상화를 그린 화공 모연수를 참형에 처했다.
◎ 중국의 북쪽 변방인 흉노까지 가는 길은 너무 황량했다. 민가는 물론 나무도 별로 없는 황무지를 가며 왕소군은 비파로 슬픈 마음을 달랬다.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이 소리를 듣고 날개짓을 못한채 땅에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부터 〈왕소군을 '낙안(落雁)미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 흉노왕 호안야가 죽자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르며 왕소군의 미색에 홀려 아내로 삼았다는 기록도 있고, 아비와 아들의 아내가 된 것을 비관, 자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오랑캐족에게 강제로 시집간 천하일색의 왕소군은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쓸쓸하게 죽어갔다.
◎ 왕소군은 죽어 흉노의 땅에 묻혔는데, 겨울이 되어 흉노땅의 모든 풀이 시들어도 왕소군의 무덤 풀만은 사시사철 푸르렀다 하여
그 무덤을 〈 청총(靑塚) 〉이라고 한다. - -(종)-

(연천향교 도평박동일調査整理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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