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세 諱 朴泳孝 1861-1939
응복-동량-미-세교-태두-필하-사익-대원-상로-海壽-齊堂-元陽-泳孝-일서-贊汎,찬주(영친왕 아들 李鍝 부인)
본관 반남. 자 자순(子純). 호 춘고(春皐)․현현거사(玄玄居士). 초명 무량(無量). 수원 출생. 판서 원양(元陽)의 아들. 13세 때 철종의 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결혼하여 금릉위(錦陵尉)가 되고, 유대치(劉大致)를 중심으로 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英植)․서광범(徐光範) 등 개화당 요인들과 결속, 정치적 혁신을 주창하며, 일본의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과 러시아의 침투를 억제하는 데 주력했다. 1882년(고종 19) 수신사(修信使)에 임명되어 민영익 ․김옥균 등과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개혁을 시도했으나 민태호(閔台鎬)․김병시(金炳始)․김병국(金炳國) 중심의 수구파의 집권으로 실패하였다. 이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서 개화당 요인들과 협의,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落成宴)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신내각이 조직될 때 친군전후영사겸좌포장(親軍前後營使兼左捕將)이 되어 군사와 경찰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삼일천하(三日天下)로 그쳐, 역적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5년 잠시 도미(渡美)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야마자키[山崎永春]로 개명하고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 입학, 영어를 배우고, 유학생들의 기숙사로서 친린의숙(親隣義塾)을 경영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죄가 용서되어 귀국, 제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에서 김홍집 ․박영효의 연립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내무대신으로 있으면서 자주적 개혁을 꾀하였으나 1895년 반역음모사건으로 재차 일본에 망명했다. 1898년 중추원 회의에서 그를 정부요직에 다시 기용하자는 건의가 나올 정도로 영향력이 컸고 이런 움직임을 반대파에서는 박영효 대통령설을 유포시켜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는 데 이용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정치적 변동은 친일 세력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907년 오랜 망명생활 끝에 다시 귀국, 궁내부대신(宮內部大臣)에 임명되었다가 고종의 양위에 앞장선 대신들을 암살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1년간 제주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국권피탈 이후 일제의 한국인 회유정책으로 주어진 후작(侯爵)을 받았으며 1918년에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이사에 취임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 사장, 1926년 중추원의장, 1932년 일본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중추원 부의장에 있을 때 죽었다. 저서에 《사화기략(使和記略)》이 있다.
박영효(朴泳孝) 1. 개화당 조직 1872년(고종 9)철종의 부마가 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별하였다. 금릉위(錦陵尉)정1품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에 봉해졌다. 큰형을 따라 박규수(朴珪壽)의 사랑을 출입하면서 오경석(吳慶錫)․유대치(劉大致)․이동인(李東仁) 등 실학, 특히 북학파(北學派)의 학맥을 이은 개화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1879년경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 등과 개화당(開化黨)을조직 하였다.
2. 일본견문과 개화시책 1882년 9월 임오군란의 사후수습을 일본정부와 협의하기 위하여 특명전권대신 겸 제3차수신사로 임명되어 종사관 서광범 등 14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본으로 갔다. 그곳에 약 3개월간 체류하면서 일본정계의 지도자 및 구미 외교사절들과 접촉하여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한편, 명치일본(明治日本)의 발전상을 살펴보았다. 이때 항해하는 배 위에서 태극사괘(太極四卦)의 국기를 제정, 일본에 도착한 직후부터 사용하였다. 1883년초 귀국한 뒤 한성판윤에 임명되어 박문국(博文局)․순경부(巡警部)․치도국(治道局)을 설치하여 신문발간과 신식경찰제도의 도입, 도로정비사업, 유색의복(有色衣服)장려 등 일련의 개화시책을 폈다. 그러나 민태호(閔台鎬)․김병시(金炳始) 등 수구파의 반대에 부딪혀, 삼국(三局)은 폐쇄되고 광주유수 겸 수어사(廣州留守兼守禦使)로 좌천되었다. 이때 수어영에 연병대(鍊兵隊)를 신설하여 신식군대의 양성에 주력하였다. 다시 수구파가 이를 문제삼음으로써 같은해 12월 사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으로 《한성순보 漢城旬報》의 창간을 볼 수 있었다.
3. 갑신정변과 망명 이처럼 정계진출이 계속 좌절되자, 1884년 2월 미국유람을 계획하였으나, 이 계획 역시 좌절되었다. 이때 개화당 인사들이 정권장악을 기도하자 이에 가담하여 먼저 미국에 협조를 얻고자 접촉하였으나 미국은 불응하였다. 다시 일본에 접근하여 여러 차례의 협의 끝에 군사적 지원을 확약받고, 같은해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켜 친청수구파(親淸守舊派)를 숙청하고 혁신내각을 수립하여 전후영사 겸 좌포도대장(前後營使兼左捕盜大將)직을 맡아 병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청국군의 즉각적인 개입으로 정변이 삼일천하(三日天下)로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뒤 본국정부의 집요한 송환기도와 일본정부의 냉대로 1885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곳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되돌아와 야마자키(山崎永春)로 이름을 고친 뒤 명치학원(明治學院)에 입학, 영어를 배우면서 미국인 선교사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4. 개화상소 1888년초 일본에 있으면서 고종에게 국정 전반에 관하여 13만여자에 달하는 장문의 개혁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이른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