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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현석공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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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생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30 11:35 조회1,7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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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반남박 종인"이라는 분이 쓰신 글 속에서

".....양자를 되돌리면 첫째 우리종중에 제일 유명한 현석 휘 세체 또 정재 휘 태보 또 대종손 등이 몇번씩 양자로 들어왔음을 보시고....."

라고 하셨는데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세보에 의하면, 정재공 휘 태보께서는 서계공 휘 세당의 중자(仲子)로 태어나셔서 서계공의 바로 위의 형님이 되시는 휘 세후에게 양자를 가셨으나, 정재공은 후사가 없어 다시 생가(生家)의 형님 되시는 휘 태유(서계공의 장자)의 둘째 아드님이신 휘 필모를 양자로 들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현재 정재공파의 후손들은 혈통상으로는 휘 세후나 휘 태보의 혈통이 아니라 실제로는 세당-태유-필모로 이어지는 혈통인 셈입니다).

그런데 현석공 휘 세체["채"(采)]의 경우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현석공의 계보는 <(11세)소 - (12세)응복 - (13세)동량 - (14세)의 - (15세)세채> 로 이어졌으며 그 사이에 양자를 가거나 들인 일이 없고, 현석공 자신께서도 4남3녀를 두셨기 때문에 전혀 양자를 들인 사실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현석공께서 1631년(인조 9년 신미) 6월 24일, 서울 창동(倉洞) 댁에서 태어나시고 얼마 있지 않아 숙부 휘 유(水+維)의 후사(後嗣)로 정해지기는 했지만, 1644년(인조 22년 갑신) 공의 연령 14세 때 생부의 상을 당하시고, 또한 백형(伯兄)인 휘 세래(世來)가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자 문중의 의논으로 다시 생부의 후사(後嗣)가 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석공의 장자이신 휘 泰殷께서 후사가 없어 아우 휘 泰輿의 장자 휘 弼莘을 후사로 들이기는 하셨습니다만 이는 현석공 자신의 가계 내부에서 이루어진 순리적인 연결이었습니다. 즉 弼莘은 현석공의 둘째 아드님 泰輿의 장자이므로 사실상 현석공의 장손이었습니다. (참고: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승계는 매우 합리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실제 장손을 장손으로 하였으니 누가 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장손이 아닌데 인위적으로 장손을 만든 경우와는 좀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17世 이후 양자를 가고 양자를 들이는 과정이 좀 복잡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 과정에서 세보(족보)를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누가 누구의 생부(生父)인지를 알아보기가 오히려 힘들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 경우에도 생가 쪽으로 정리를 해 둔다면 그 혈통 파악이 훨씬 쉬울 것입니다. 어쨌든 현석공 자신은 실제로 양자를 가시지도 않았고 또 양자를 들이신 일도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양자 이야기를 하시면서 현석공을 거론하셨는지 이해가 잘 안됩니다. 혹시 제가 뭔가를 잘못 알고 "끼어 든" 것인가요?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의문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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