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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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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30 11:29 조회2,1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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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향문.jpg
진향문.jpg


 홈페이지 역사인물란에보면 (동량-신도비가--신돌비로 쓰여있고
>                         (수빈박씨가--수비박씨로 기재되여있음
> 여러가지을 하시다보면 잘못되는 일이많게지만 명칭만은 제대로 기재하여
> 주셨으면함니다
> 그리고 반남박씨 홈페이지와 박찬무홈페이지하고 혼동이도오니이에대한 종원들에게
> 혼동없게 홍보가있었으면함니다
> 태서씨 수고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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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 박씨가 아니라 유비 박씨로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로 사후 비로 추존되어 신위를 칠궁내 '경우궁'에 모신 박씨는 수비 박씨가 아니라 유비 박씨로 호칭해야 한다 지금껏 기존 학계에서는 순조의 생모를 수비 박씨로 호칭했다. 수자를 깃발늘어진 '유'가 아니라 편안할 '수'로 읽은 탓이다. 그런데 순조 23년 (1823년) 박씨의 장례때 사용한 문서 <진향문>에는 수빈이 아닌 유빈으로 호칭되어 있다. 왕의 어머니 호칭을 잘못 적을리 만무하니 수빈이 아니라 유빈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 비로 추존 되었으니 유비가 되는것이다. 고종 39년 특진관 이주영이 황후로 올리는 의식을 상소했으나 결국 안됬다.

綏嬪 朴氏
1770(영조 46)~1822(순조 22). 조선시대 순조의 생모. 본관은 반남(潘南).
아버지는 좌찬성 준원(準源)이며, 어머니는 원주원씨(原州元氏)이다. 그가 잉태될 때 어머니 원부인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큰 구슬을 바치매 그 광채가 온 집안에 가득하였다 한다
어릴 때 두 여형(女兄)과 함께 있었더니 별안간 큰 호랑이 한마리가 뜰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두 여형은 놀라서 넘어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으나, 그는 조용히 걸어가서 방안으로 들어가니 모두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았다.
1787년(정조 11)에 정조의 빈이 되어 순조와 숙선옹주(淑善翁主)를 낳았다. 왕자를 낳은 뒤 왕자를 낳지 못하는 왕비를 위로
하고 공경하니 온 궁중에 화기(和氣)가 가득하였다.
또한, 행실이 착하고 예절이 바를 뿐만 아니라 평소에 말이 적으며 의복과 일상용품들을 극히 검소하게 하니 조야에서 현빈
(賢嬪)이라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어느날 그의 궁에서 시중을 드는 나인(內人)이 의복을 만들 때 작은 천조각을 버렸다가 크게 꾸중을 받은 일이 있었으며, 또
한 후궁인 그의 왕자가 세자로 책봉되자, 아첨하는 무리들이 그에게 은밀히 귀중품을 진상하였다가 의금부에 잡혀간 일도
있었다.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죽었다.

《고종 38(1901)/10/11(양력) / 현목수빈을 유비로 높여 봉하다 》
현목 유빈(顯穆綏嬪)을 유비(綏妃)로 높여 봉하고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올리는 의식을 대신 진행하였으며 축하를 올리고 조서(詔書)를 반포하였는데 간략한 의식으로 하였다.
조서(詔書)는 이러하였다.
“효성으로는 조상을 높이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니 종묘(宗廟)의 의식 절차를 새롭게 하고 예의에서는 옛 법을 상고하는 것이 중요하니 궁직(宮職)의 질서를 높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예로부터 제왕들의 집안에 전해오는 움직일 수 없는 아름다운 규범으로서 이제 내가 어찌 그대로 시행하지 않겠는가.
삼가 생각건대
현목 수빈(顯穆綏嬪)은 천품이 순결하고 천성이 정숙하였다. 이름있는 가문의 딸로서 범절에는 물려받은 아름다움이 있었고 훌륭한 용모와 의젓한 행동으로 폐백을 갖추어 선발하는데 뽑혔다. 훌륭한 꿈을 꾼 것은 황태자를 낳을 상서로운 징조에 부합되고 범이 지나가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곰이라도 당해낼 떳떳한 공적을 기대한 것이었다. 경술년(庚戌年)에 아들을 낳으니 크나큰 복록은 나라의 좋은 운수를 이어 놓았다. 왕비(王妃)를 도우니 두드러진 공로는 태사나 태임(太任)에 미쳤고 자궁(慈宮)을 모시니 각근한 지성은 아침 저녁 문안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마음을 잡아 생각이 깊고 덕(德)! 이 가득했으며 불행에 처하여도 끝까지 한생을 누렸고 훌륭한 계책을 품고 있어 세월이 오래될수록 더욱 빛났다.
나는 조종(祖宗)의 좋은 운수를 잇고 하늘의 밝은 지시를 받아 큰 위업을 세운 후로 온갖 예절을 한껏 충분히 갖추었다. 우리 정조 선황제(正祖宣皇帝)의 칭호를 소급하여 높인 만큼 그 다음으로 비(妃)를 소급하여 높이는 것은 떳떳한 규례이다. 그래서 이해 음력 8월 29일에 삼가 인장을 올리고 유비(綏妃)로 높여 봉하였으니 황후의 의장은 제도대로 하고 금궤(金櫃)에 보관하는 것은 예법이 그러한 것이다.
삼가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보니 감격스러운 마음이 더해진다.【열거한 응당 시행해야 할 사항들은 생략한다.】
아, 법은 전대(前代)에 근거하여야 하니 그것은 모든 선왕들의 것이고 훌륭한 계책은 길이 후대에 물려주니 우리 자손 만대에 내려갈 것이다. 온 나라에 공포하여 모두 알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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