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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공 휘 필건(보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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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종원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30 11:13 조회1,696회 댓글0건

본문

양정공 휘 필건(弼健)에 대한 보충 자료입니다.

1671(현종 12)生. 1738(영조 14)卒.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경운(景運)이다. 이조판서 태상(泰尙)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상의원정(尙衣院正) 조속(趙涑)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나 질병으로 공부에 힘쓸 수 없어 과거를 포기하였다.

1710년(숙종 36) 음보(蔭補)로 영소전참봉(永昭殿參奉)이 되고, 1713년 전생서주부(典牲署注簿)를 거쳐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청양현감·정산현감 등을 지냈으나 번번이 병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해주판관(海州判官)을 지내고, 남원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724년 평소부터 그의 치적을 들었던 이조의 전랑 조문명(趙文命)에 의하여 천거를 받고, 선산부사가 되었다.

1728년 선산부사로 있을 때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우방장(右防將)으로서 거창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여 정희량(鄭希亮)·이웅보(李熊輔) 등 반란군의 거물들을 죽였다. 그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이 되어 금릉군(錦陵君)에 봉해졌다.

1729년 부총관(副摠管)이 되고, 이듬해 한성부우윤·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지냈다. 1731년 곡산부사(谷山府使)가 되어 부임하기도 전에 관사(官舍)가 불탔으나, 다시 짓는 데 농사일에 바쁜 백성들의 힘을 동원하지 않아 칭송을 듣기도 하였다.

1734년 한성부좌윤이 되고, 이어 삼화부사(三和府使)를 지냈으며 1737년에는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공신으로 책봉되었으나 자신의 공훈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당론과 사치가 나라와 집안을 망치는 고질이라고 보고 유언을 남겨 자녀들을 경계시켰다.

완소(緩少)계열로서 조문명·송인명(宋寅明) 등이 주도했던 탕평책에 적극 동조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여기까지 퍼온 글>.

참고: "준소"와 "완소"에 대하여

1. 인현왕후(숙종비) 지지 세력인 서인과 장희빈(숙종후궁) 지지 세력인 남인 사이의 권력 투쟁에서 서인 승리.

2. 탐욕스럽기로 유명한 외척 김익훈의 비리를 처리하면서 서인들이 노론(노장파)과 소론(소장파)으로 분열. 노장파(노론) 송시열, 김수항 등은 김익훈을 두둔하였고 한태동 등 소장파(소론)들은 그 반대편에 섰음.

3. 3대 환국(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을 거치면서 남인이 완전 몰락하고 서인 중 노장파(노론)가 득세함.

4. 서인 중 소장파(소론) 세력은 장희빈의 소생인 세자(훗날의 경종)를 옹위하고 노론과 대립하며 기회를 노림.

5. 노론 세력은 즉시 연잉군(훗날 영조)을 끌어 들여 옹위하고 소론을 제거하려함.

6. 경종이 즉위하면서 정권은 소론의 손에 넘어 가는 듯.

7. 그러나 이 때 노론은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려 함.

8. 그러자 당시 소론의 영수 김일경은 이를 빌미로 역모 사건을 조작하고 노론 세력을 대대적으로 말살하려 함. 이것이 소위 "신임사화"이다. 이때 연잉군(영조)도 소론 세력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수차 받았다고 함.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사화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음).

9. 신임사화時 노론에 대한 처리를 두고 소론 내부에서 강경파(소위 "준소"(埈少))와 온건파(소위 "완소"(緩少))로 갈라짐. (참고: 소론 강경파("준소")는 연잉군(영조) 제거를 기도하기도 했다고 함).

10. 노론이 실각후 소론이 정권 장악.

11. 그러나 경종이 일찍 죽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권은 다시 노론으로 넘어감.

12. 노론의 지지를 받은 영조는 즉위 후 소위 "탕평책"을 실시하게 되는데, 이때 소론의 온건파(완소) 계열을 용서하고 등용하여("정미환국") 오히려 노론 세력을 견제하게 한다.

13. 영조의 용서를 받지 못한 소론의 강경파("준소") 세력들이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일으킨 난이 저 유명한 "이인좌의 난"이다.

14. 당시 출사하고 있었던 반남박씨들은 대체로 소론 계열이었는데 내부에서는 "준소"(강경파)와 "완소"(온건파)로 갈라져 있었다.

15. 예컨대,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던 태인 현감 필현 선조, 필몽 선조는 "준소" 계열(영조와 대립)이고, 이인좌의 난을 진압했던 선산부사 필건 선조, 신임사화의 전말을 밝힌 감란록(勘亂錄)의 찬수를 맡았던 사수(師洙)(대사헌 필명(弼明)의 아들) 선조는 "완소" 계열(영조의 용서를 받고 영조 지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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