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효첨선생이 평도공 사위가 된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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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람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30 10:41 조회1,723회 댓글0건본문
평도공(平度公) 휘(諱) 박은(朴訔) 사위 문효공(文孝公) 휘(諱) 어효첨(魚孝瞻)의 박가도리(朴家挑梨)
※ 다음글은 함종어씨 종보 (2002년 10월 1일)에서 발취하여 편집 정리한글입니다
글을쓰신분은 어윤경(魚潤慶)님으로 함종어씨 종회 고문 이심. 이글은 함종어씨댁에 허락을 받아 올린 글임, 원문을 그대로 쓰기에는 적절하지 않아 편집 정리 하였음
증영의정 함종부원군 시 문효공 구천 어효첨 선생은 태종 5년 10월 10일 생이시니,
태종 8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많은 일화를 남기신 집현전 직제학 면곡 魚變甲 공의 아들로 경남함안군 산인면 내인리에서 출생하셨다.
세종 5년(1423년) 문과에 급제하시니 직제학공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신후 3년째 되던해로 그 아버님에 이어 양대에 걸친 대과급제이시니 가문의 융성하는 징조이다.
부친이신 직제학공께서 장원급제 하시고 이름이 드높이 날리는 존경받는 당대 제일의 학자로 벼슬길에 나가셨으나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시골선비로서 일가 권속을 거느리고 서울 살이를 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벼슬살이가 어느만큼 자리가 잡히신 이후에 상경을 하셨다.
서울로 오신 지 오래지 않았을 때 였던 것같다.
한양에 와서 동무들을 시귈 수있는 기회도 없었던지 오직 책상과 씨름하고 있으려니 소년은 마음은 권태롭고 무료하여 동무들과 어루려 뛰놀던 고향의 언덕을 생각하며 또 할아버지 할머니의 따뜻한 미소와 사랑을 그리워 하며 남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때, 소년의 눈길 속에 들어온 것이 있다.
대궐처럼 큰 기와집 뒤쪽 담 넘어에 붉게 농익은 복숭아가 주렁주렁 달린 복숭아 나무! 소년의 지루함과 무료함은 순식간에 호기심과 장난기로 바뀌어 책장을 덮어놓고 후다닥 밖으로 뛰쳐 나간다. 동쪽 담을 훌쩍 뛰어넘어 잘 익은 복숭아 하나를 골라 따려는 순간, 안채의 낮은 창문이 드르륵 열리며
“이놈 ! 너 꼼짝 말고 게 섯거라” 한는 안방마님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마지 훤칠한 장절들이 어느 뜸에 달려와 꼼짝 못하게 붙들지 않나. ‘아차 내가 월장(越牆)을 하였으니 큰 봉변을 당하겠구나’ 후회할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마침 집에 계시던 그집 주인 박은(朴訔)대감은 안채가 왁자지껄하는 소리로 소란하자 하인에게 묻는다.
“무슨일로 이리 집안이 소란한고?” 하니
“어떤 조그만 낯선 녀석 하나가 뒷담을 넘어와 복숭아를 따려다가 마님께 꾸중을 듣고 있습니다”아뢰니
“그녀석 이리 대령하라 !” 지시하니 하인들에 의해 끌려온 손년은 마당에 꿇리어 앉아 머리를 숙이고 있다.
이 댁의 주인은 당대의 권신으로 나는 새도 떨군다는 저 유명한 의정부 좌의정 박은 대감이시다. 대감이 묻는다. 추상같은 위엄앞에 소년은 잔뜩 주눅이 들어 있을때,
“어디 사는 누구의 자식인고 ?” 하니
“뒷집에 사는 집현적 학사 어 아무개의 아들 옳습니다” 하니
집현전 학사 어 아무개라면, 그 학덕이 높고 지조가 출중하여 세상에 평판이 자자한 바로 그 어학사의 아들이란 말인가 ? 내심 놀라며, 좌의정 대감도 첫눈에 범상치 않은 소년임을 눈치챘던지 이것 저것 묻다가,
“너도 글읽기를 시작하였느냐?” 물으니
“네” 하고 소년은 대답하였다.
“그러면 내가 도(挑)자와 니(你)자를 운(韻)을 줄 터이니 이 자리에서 시를 지어 바치면 상급으로 복숭아 한 상자를 줄것이로되 그렇지 못하면 네 나이대로 종아리를 맞을 것이다. 괜찮겠냐?” 하고는
하인을 시켜 지필묵을 대령케 하니,
서슴없이 “네” 하고 글릉 짓는데 마치 준비해 놓고 있었던 것처럼 거침이 없다.
소년이 써서 내민 시는 다음과 같다.
朴家挑梨蘭滿紅 박가네 집 복숭아가 빨갛게 농익어,
我欲食志踰牆東 내가 먹고싶은 마음을 못이겨 동쪽 담을 넘었더니,
你妻開戶我見嘖 니 처가 문열어 나를 보고 소란스리 책마하니,
憎惡憎惡風盡落 밉고도 밉구나 바람에 다 떨어져 버려라.
좌정승이 이글은 보니 깜찍한 속에 기개가 넘치고 당돌함 속에 재주가 번득인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기상이 있으니 찬찬히 내려다보며 훨씬 부드러워진 어조로 다시 묻는다.
“올해 너는 몇 살인고?”
“네, 여덟살입니다” 좌의정은 무릅을 쳐 탄복을 하며 그 재주를 칭찬하고 약속한대로 복숭아 한 상자를 상급으로 하인에 들려 보낸다.
그날 저녁 퇴청해 오는 어학사를 정중히 초대하여 낮에 있었던 일을 소상히 설명하고는 정승의 막내 따님으로 하여 사위 삼기를 간청하기에 이르니 박정승의 사람 보는 혜안 또한 대단하지 않았던가,
복숭아의 유혹을 못 이겨 월장(越牆)을 했던 일이 인연이 되어 그 댁의 사위가 되기에 이른 인연이야말로 어린 소년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사건이 된 것이다 [이시는 구전으로 수백년 동안을 후손의 입을 통해 전해온 것이다]
평도공의 사돈
어변갑 [魚變甲, 1380~1434]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태종 때 성균관주부 ·좌정언 ·우헌납 등을 지내고 세종 때 집현전직제학 ·춘추관기주관을 거쳐 사간원지사에 올랐다.
본관 함종(咸從). 자 자선(子先). 호 면곡(綿谷). 1399년(정종 1) 생원을 거쳐, 1408년(태종 8) 식년문과에 장원하여 교서관(校書館)의 부교리로 발탁되고, 성균관주부를 거쳐 좌정언(左正言) ·우헌납(右獻納)을 지냈다. 1420년(세종 2) 새로 설치된 집현전(集賢殿)의 응교(應敎)로서 지제교(知製敎) ·검토관(檢討官)을 겸임하였으며, 1424년 집현전직제학 ·춘추관기주관(記注官)을 거쳐 사간원지사(司諫院知事)에 올랐다. 좌찬성이 추증되고, 고성(固城)의 면곡서원(綿谷書院)에 배향되었다.
- ⓒ 두산백과사전
어효첨 [魚孝瞻, 1405~1475]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 검열 ·집현전교리를 지냈고 《예기일초(禮記日抄)》를 편찬하였다. 이후 직제학 ·대사성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성종 때 중추부판사로 치사하였다.
본관 함종(咸從). 자 만종(萬從). 호 구천(龜川). 시호 문효(文孝). 1423년(세종 5) 생원을 거쳐, 1429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에 등용, 이어 집현전교리가 되었다. 서연(書筵)에서 《예기(禮記)》를 강(講)하면서 제가(諸家)의 요설(要說)을 수집, 《예기일초(禮記日抄)》를 편찬하고, 1446년 응교(應敎)로 춘추관기주관(記注官)이 되었다. 1449년 직제학이 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집의(執義)에 발탁된 뒤 내자시판사(內資寺判事)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단종 때 예조참의가 되었다. 세조 초에 각 조(曹)의 참판, 대사헌, 중추원사를 거쳐, 1463년(세조 9) 이조판서, 1474년(성종 5) 중추부판사에 이르러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풍수설(風水說)을 배격하고 척불(斥佛)을 주장한 대유(大儒)로 이름이 높았다.
- ⓒ 두산백과사전
※ 문효공이 8살때면 평도공께서는 좌의정이 되시기전(좌의정은 문효공 14세 때임) 호조판서 시절이시며 구전에기에 조금 과장된 면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 평도공의 외손자 어세겸과 어세공 (어효첨의 아들)
어세겸 [魚世謙, 1430~1500]
조선 전기의 문신. 남이 등 반역자들을 주살하여 익대공신에 봉해지고 예조참판에 올랐다. 외교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오륜서》 등 귀중한 책을 들여왔고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본관 함종(咸從). 자 자익(子益). 호 서천(西川). 시호 문정(文貞). 중추부판사 효첨(孝瞻)의 아들이며, 우참찬 세공(世恭)의 형, 좌의정 박은(朴訔)의 외손이다. 1451년(문종 1)에 생원, 1456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459년 이극배(李克培)를 수행하여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1466년 예문관직제학을 지내고, 이듬해에는 우승지가 되었다. 1468년 남이(南怡) 등 반역을 도모한 자들을 주살한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봉해졌다. 1471년 예조참판에 올랐다.
1479년 외교관으로 명나라에 가 성공을 거두고 귀국할 때 《오륜서(五倫書)》 《국자감통지(國子監通志)》 등 귀중한 책을 들여왔다. 1495년 우의정에, 이듬해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1498년 무오사화로 물러나면서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학식이 뛰어나고 일처리가 능률적이며, 문무를 겸비하였다 한다. 1483년 서거정 등과 함께 《연주시격(聯珠詩格)》 《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을 한글로 번역했고, 1490년에는 임원준과 함께 《쌍화점(雙花店)》 《이상곡(履霜曲)》 《북전(北殿)》 등을 개찬하였다.
- ⓒ 두산백과사전 -
어세공 [魚世恭, 1432~1486]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조 때 병조좌랑 ·좌승지 등을 지내고 함길도관찰사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공신에 책록되었다. 성종 때 중추부지사 ·한성부판윤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뒤 우참찬에 이르렀다.
본관 함종(咸從). 자 자경(子敬). 시호 양숙(襄肅).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56년(세조 2) 문과에 형 세겸(世謙)과 함께 급제하여, 정자(正字)가 되고 박사 ·한성부참군(參軍) ·병조좌랑 ·성균사예(成均司藝) ·좌승지를 지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함길도관찰사에 중용되어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敵愾)공신에 책록되어 아성군(牙城君)에 봉해졌다. 그 후 병조판서를 거쳐,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70년(성종 1) 경기도관찰사, 1472년 중추부지사, 1477년 한성부판윤을 지낸 뒤 호조판서로 좌빈객을 겸하고, 이어 각 조의 판서를 역임한 뒤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다. 경학(經學)에 능하여서 특진관(特進官)을 겸임하였다.
- ⓒ 두산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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