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인물 | 12세 남일공南逸公 응남應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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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중 작성일16-03-30 19:47 조회1,343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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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 남일공南逸公 응남應男] 1527(중종22)∼1572(선조5) 자는 유중(柔仲), 호는 남일(南逸) 또는 퇴암(退庵). 임종(林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년(兆年)이고, 아버지는 사간 소(紹)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사부(士俯)의 딸이다. 10살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 와서 유조순(柳祖詢)으로부터 배웠고, 뒤에 성제원(成悌元)· 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53년(명종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과 육조의 참의·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대사헌으로 있을 때 국정을 전단하던 이량(李樑)의 죄를 탄핵하다가 귀양 갔으나 왕이 특별히 용서하여 풀려났다. 명종이 임종할 때 좌승지로 금중(禁中)에서 숙직하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 함께 고명을 받아 선조가 왕위를 계승하는 데 공을 세웠다. 명종의 비妃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沈義謙)과 친교가 두터워 조카딸(응순應順의 딸)을 선조비로 책봉하도록 하였으며, 궁중의 복색을 화사하고 선명한 것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이이(李珥)는『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남일공은 고지식하며 말을 과감히 하고 겉으로는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는 듯하나 속으로는 시비를 판단하는 기준이 있었다.”고 평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였기 때문에 대사헌을 10회 역임했고 재임 중 기탄없는 논박을 하여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 왕비의 숙부였으므로 왕의 총애를 받으니 사림(士林)의 큰 힘이 되었고, 그가 별세하자 사류(士類)들이 애석하게 여겼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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