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인물 | 20세 충익공(忠翼公) 종보宗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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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중 작성일16-03-31 15:47 조회1,353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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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 충익공(忠翼公) 종보宗輔] 1760(영조36)∼1808(순조8) 자는 여신(汝臣). 아버지는 판돈녕부사 준원(準源)이며, 어머니는 증 이조참판 원경유(元景游)의 딸이다. 1787년(정조 11) 음보(蔭補)로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에 등용되고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의빈부(儀賓府)와 충훈부(忠勳府)의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178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정조의 아들이 태어나자 임금의 명에 따라 궁중에서 보육의 책임을 맡았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할 때, 왕의 몸을 보호하는 가까운 친척이 측근에 있어야 한다고 해 임금의 외숙으로서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공조참의가 되고, 임금이 천연두를 앓을 때 입직한 공로로 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803년 형조참판을 거쳐 성천부사(成川府使)· 춘천부사(春川府使) 등을 역임하고, 1806년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사도시제조(司䆃寺提調)가 되었다. 이 때 대신들의 천거로 호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음관(蔭官)이 단천(單薦)으로 호조판서가 된 것은 유례가 없다.”고 세 차례나 상소해 사양하였다. 비변사당상으로 바꿔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정조로부터 “비록 음관으로 벼슬에 올랐지만 풍도(風度 : 풍채와 태도)는 문신과 같으니 후일 마땅히 재상이 될 것이다.”라는 평을 받았다. 여러 번 과거에 떨어졌으나 태연하였다. 초년에 빈한하게 살았기 때문에, 높은 관직에 올라 녹봉이 많아지자 즐겨 남을 도와주었으며, 서예에도 재능이 있었다.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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